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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18. 2016

시장 골목의 젊은 언니 봉순 그리고 다락방

#끝. Epilogue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이야기로 서두를 다룰까 한다.


내가 긴 시간 동안 파워블로거의 자리를 유지하고 또 이렇게 월간 <그들 보기>에 전세를 놓을 수 있는 데는 비법이 하나 있다.


방송국으로 출근을 하는 것이다. 방송국 직원은 아니다. 그 주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특히 점심시간에 맞춰 근처 식당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지인과의 약속도 주변 카페에서 잡고는 한다. 그곳에서 오가는 대화가 다른 동네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 톤에 익숙해졌고 어제와 다른 단어가 무엇인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단어가 새로운 키워드인지 또는 며칠 동안 반복되는 핫이슈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당연히, 내 관심사는 항상 새로운 키워드였다. 새로운 그것이 며칠 동안 숙성되어 핫이슈가 되기 전에 블로그에 풀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관련 자료를 최대한 수집해서 얼개를 잡다 보면 여러 매체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때쯤 내 글도 완성이 된다. 검색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자연히 내 블로그에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상위 랭커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오늘 이 비법을 털어놓는 이유는, 최근 이 비법으로 인해 겪었던 사건 때문이다. 아니, 재미난 경험이라고 해두자.


수개월 전, 다른 날과  어김없이 K방송국 인근 국밥집에서 주변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식당 문이 열리더니 어딘가 생소한 얼굴의 남녀가 들어섰다. 딱히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도 없는데 마치 음식점을 처음 온 사람들처럼 우왕좌왕 앉았다가 섰다가 반복하더니, 굳이 넓은 자리를 두고 사람들 틈바구니의 가운데 테이블로 들어와 앉았다.


큰 액세서리와 얇게 늘어지는 옷을 입고 전반적으로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에 비해 남자는 저돌적인 앞가르마와 무테안경을 두르고 반듯한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대조적인 분위기를 보며 작가인 여자와 그녀를 인터뷰하려는 기자, 아니면 작가의 문하생 정도로 생각했다.


그날따라 특별한 키워드는 없었던 지라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들은 앉자마자 음식도 주문하지 않고 대화를 시작했다. 속닥거리는 것 같은데 묘하게도 단어들이 귓전까지 배달되는 느낌이었다. 놀라운 점은 작가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오히려 기자였다는 점, 그리고 어딘가 상기돼 보이던 앞가르마 남자가 그녀의 상사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그곳 사람들, 그러니까 방송 관계자 및 기자들에 비해 대화의 톤이 굉장히 부산스러웠다. 여자는 개념 없는 신입기자이고, 그녀의 상사인 남자도 처음으로 부사수를 달고 취재를 맡은 초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꽤나 들떠 보였다. 경계하며 뱉는 그 단어들이 대단한 특종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조직에서나 신입들은 비밀의 경중을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매우 중요한 대외비 문제도 장소 구분 없이 얘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훔쳐낸 키워드는 왕십리, 시장 골목, 봉순이, 다락방이 전부였다. 참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키워드는 정말 단순했다. 자료를 모으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검색해보았지만 세 키워드의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만큼 욕심이 났다. 고하 건대, 정말 뭔가 큰 건을 찾아낼 것만 같았다. 결국 왕십리에 있는 시장 골목을 직접 돌아봤다.


봉순이네 다락방.


카페였다. 마침 가랑비까지 내리는 정오에 그 북적거리는 시장 골목을 헉헉대며 헤맸다. 그렇게 골목 깊숙이 들어서자 도무지 그 향토적인 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건물의 일부가 나무판자로 감싸져 있었다. 작은 테라스가 있었고 그 위엔 하얀색 천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테라스 옆엔 노란색 철문이 있었다. 그 어색한 풍경을 보며, 식당에서의 남녀가 쉬쉬거리며 얘기했던 곳이 그곳임을 직감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무 냄새가 났고 실제로 계단의 벽면에 있는 책장부터 바닥까지 온통 나무로 되어 있었다.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어딘가 밋밋한 맛에 당황하려는 찰나, 점원이 내가 첫 손님이라고 했다. 역시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타이밍을 잡았다고 여겼다. 뭔가 대단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고 기자 몇몇이 은밀히 그곳을 취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날부터 나의 출근 장소는 봉다방으로 바뀌었다.


그곳의 이야기들을 모으다 보니 역시나 참 특이한 곳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언제부턴가 벽에 얼굴 그림들이 붙었다. 의미 없는 얼굴들이겠지 생각했는데 내 얼굴이 보였다. 거울 속 모습보다는 많이 부족하지만 딱히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한 내 얼굴이었다. 훗날 알고 보니 그곳이 손님들의 쿠폰이 걸리는 자리인데  단골손님일 경우 얼굴을 그려 놓는다고 했다. 물론 어떤 쿠폰이 본인인지는 따로 얘기해주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알아볼 것이니.


이밖에도 주인의 배짱을 알 수 있는 대목들이 곳곳에 있다. 메뉴 이름이 특히 그렇다. 아메리카노 뭐라노, 에스프레소 좀 보소, 대충 이런 식이다. 드립 커피를 시키면 드리퍼와 드립포트도 함께 나온다. 니가 직접 따라서 마시라는 얘기다. 자세히 보면 고양이도 한 마리 키우고 있다. 이름이 ‘홍자’라는데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곳의 나무들과 같은 색을 띠고 있는 데다가 구석에서 가만히 명상 중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메뉴가 완성되면 호명될 이름의 팻말도 고를 수 있다. 연예인 이름이 많은데 커플들이 주로 이용한다. 난 민망해서 주로 ‘동네주민’이라고 적힌 팻말을 집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시음회를 하길래 다가가 보았더니 점원은 없고 웬 마네킹만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카페 문간에 서있던 그 마네킹이었다. 물론 그 북적거리던 사람들 틈에 점원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느 날 점원이 내 다이어리의 커버가 바뀐 것을 알아봤다. 정말 많이 놀랐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꽤나 적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들이 거의 모든 손님들의 분위기라던가 특징을 프로파일링 하며 나름의 단골 전략을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내가 하고 있던 실수도 발견했다. 그 장소와 맛에만 집중하느라 멍청하게도 그것들을 만든 ‘사람’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이야기는 그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집중을 시작하면서 참 허무한 사실을 알아챘다. 동시에 모르고 지나쳤다면 꽤나 아쉬웠을 그 진실.


그들, 그러니까 봉순이네 다락방의 여사장인 금봉순씨와 그 점원인 허봉팔씨를 처음 본 곳이 그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K방송국 앞 국밥집, 그곳에서 부산스럽게 키워드를 던져대던 이들, 아빠 양복 빌려 입은 듯 어색한 행색에 앞가르마를 타고 있던 남자, 그리고 그 앞에서 끄덕이며 기자인 척했던 여자가 바로 이 두 명이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당연히 이곳에 특종은 없었다. 그리고 굳이 방송국 근처까지 와서 정보를 흘리던 그들의 의도를 알 수도 없다. 아마도 이곳에서 진행 중인 엉뚱한 전략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곳으로 발을 옮겼고 결국 그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그렇게 알게 된 <봉순이네 다락방>을 소개한다.


일단 봉다방의 디저트 맛은 정신을 놓을 정도로 일품이다. 재밌는 점은, 그 디저트를 만드는 점원이 내가 예전에 포스팅해서 꽤나 이슈가 되었던 <도심 속 슈퍼맨>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인가 커피의 맛도 혀에 띄게 좋아졌는데 듣기로는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점원의 손맛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봉다방만의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초창기부터 이곳을 일궈온 두 남녀, 사장인 금봉순씨와 그 오랜 친구인 허봉팔씨의 끝없는 고뇌 속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이들의 미묘한 밀당을 지켜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다. 어쨌든 이렇게 각기 다른 4인이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곧 봉다방일 것이다.


처음 발견하고 글을 쓰기 전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이곳에 정이 들어버렸다. 어쩌면 이 글은 본분을 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번쯤은 봉다방의 노란색 철문을 열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돼 보길.




당신들이 독거여인이라 부르던,

칼럼니스트 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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