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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17. 2016

이곳 봉다방

#43. 우린 또 다른 시작을


입석이지만 뭐 어떠랴.


넘어질 듯 달려가 기차를 탔다. 기차는 본연의 속도를 지킨다. 발 굴러 그 속도 빨라진다면 서울까지 구르고 싶다.


맘 급해서인지 시선이 여기저기 흩어진다.  휴대폰을 꺼냈다가 넣는다. 전화번호 누르다가 다시 넣는다. 이 사람 저 사람 정수리도 보인다. 그들이 보는 휴대폰 속 세상도 보이고 그들이 보는 잡지의 표면도 보인다. 그중 어떤 곳에 주의가 모인다. 낯익은, 정말이지 너무 낯익은 단어 몇 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늘이 돕는구나.


"저기요."


여자가 고개를 든다.


"제가 그 잡지를 좀 살 수 있을까요?"

"네? 이거 지금 서점에서 팔아요."

"아 네. 그런데 보고 계신 잡지가 필요해서요."


지금 여기서 발견했으니까.


"이건 제가 직접 산 거예요."

“아, 네. 제가 다시 살게요.”


“왜 꼭 제걸 사셔야 되는데요?”

“아… 네. 그 잡지 여야 의미가 있어서요.”


“왜 제가 보고 있어야 의미가 있죠?”


이 여자 큰일이네.


“아, 그게 아니라…”

“됐어요.”


그녀는 무슨 수작이라도 거는 남자를 대하듯 말을 끊었다. 난 목표물을 얻기 위해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는 말을 골랐다.


"저기 선생님.”

"선생님이요?”


"아, 죄송합니다. 오해하실까 봐.”

"별꼴이야.”


쉽지 않다.


"부탁 좀 드릴게요...”

"무슨 부탁이요?”


지금까지 얘기했잖아.


"그 잡지요…"

"네?"


너 말고 그 잡지 달라고. 제발.


"원하시는 금액 드릴게요."


그렇게 잡지가 되고 싶은 여인과 실랑이를 하다 보니 도착을 알리는 차내 방송이 나왔다.




왕십리 시장 골목.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곳의 밤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야 하는 어둠의 장이었다. 해가 지면 대부분의 상인들은 철문을 내리고 그 뒤편에 있는 자신의 처소로 몸을 들였다. 그렇게 내려앉은 어둠의 안갯속에서 봉순의 지하실 문을 열면 그 안에 모여있던 은은한 불빛들이 마중 나왔었다.


봉다방이 생겼을 때만 해도 밤거리의 어둠은 건재했다. 봉다방만이, 어둠 속에서 홀로 은은한 조명을 흔들었다. 마치 그 안에 꽤나 큰 초가 몸을 녹이고 있는 것 같았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이곳은 많이 변했다. 밤 10시가 지난 시간까지도 어둠이 끼어들 틈은 많지 않다. 불 밝은 이곳을 걷고 있자니 그 시절 홀로 불 밝히던 봉다방의 여운이 떠오른다. 혹시 내가 없던 사이에 그 불빛이 사라진 건 아닐까,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발 끝에 힘을 더해 걸음의 속도를 높인다.


봉다방의 불빛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다. 그런데 꽤 근처에 다가가서야 그 빛이 예전과 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변이 더 밝아졌을 뿐이다. 도심 속 반딧불은 여전히 그곳에서 자신만의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겨운 노란색 문을 연다. 문의 관절이 숨을 죽인다. 누군가 기름칠을 했나 보다. 아니면 날 위한 문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계단을 내려간다.


주방에서 마감을 준비 중인 봉순의 모습이 보인다. 발소리를 들었을 텐데 돌아보지 않는다.

나라는 것을 안다.


"잔 새로 샀네?"

"어.” 그녀가 하던 일을 하며 대답한다. “홍자가 선반에서 몇 개 떨궜어."


"홍자가!?"


조금은 큰소리에 놀랐는지 멈췄다가 다시 본래의 시선을 유지한다.


"응. 홍자가."

"홍자가 선반에 올라갔단 말이지... 음."


"어. 마로가 열일 제쳐두고 손들고 있게 했어."

"오, 그랬군."


"응. 그랬지."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그런데 봉순아."

"어?”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리는 게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놀란 그녀의 표정이 그리고 시선이 아주 잠깐 이쪽을 향했다가 사라졌다.


"그, 고양이는 보통 선반에서도 물건 사이로 잘 다니지 않나?”

"그치. 홍자는 아직 어리니까."


"홍자가 어린가. 그래도 꽤 된 것 같은데.”

"아, 그런가.”


“왜 그거 있잖아 동물 나이를 사람 나이로 환산하는 뭐 그런 거.”

“아, 그런 게 있어?”


“어. 있더라고. 그…”

“어?”


“아니야. 그냥, 음,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네.”

“아, 뭐, 어쩔 수 없지.”


글쎄, 이런 상황에서 나누는 대화가 이게 맞는 건가.

그런데 그녀가 어딘가 어색하다. 그 대답이 그 끝이 평소보다 길어진 것 같다. 단 몇 글자로 대화를 잇던 모습과 다르다.


날 기다렸던 것일까.


"오다가 주웠어."


그녀의 친절한 응수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말소리보다 침묵의 공기가 길어질 때쯤, 필살기를 던졌다. 펼쳐진 잡지의 양면에는 몇 장의 사진과 그림, 그리고 빼곡한 글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시장 골목의 젊은 언니 봉순 그리고 다락방’이라는 글자가 크게 박혀있다. 그녀가 토끼 눈을 뜨며 나를, 본다.


"봉순아, 인지부조화 작전 기억나?"


이제야, 본다.


"방송국 근처 돌아다녔던 거?"

"응."


내 앞에 그녀의 얼굴이 있다.


놀란 눈의, 하지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 얼굴이.


"성공이었다고?"

"그런가 봐."


그 찰나의 놀란 마음일지. 혹은 오랜 기다림 때문일지. 어쩌면 이런 상황을 마주해본 적 없는 이의 어설픈 선택이었을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넘어짐인지.


모르겠다.

단지 그녀가 날 향해 몸을 던졌다는 것.


그렇게 얼씨구나 그녀를 품으로 당긴 것.

거친 숨 가라앉을 때까지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기다렸다는 것.


그거면 됐다.


타이밍 좋게 우리를 휘감는 현악의 선율, 이 큰 심장 소리 감쳐주는 콘트라베이스의 리듬이 있다. 선반 위에 빼꼼 머리를 내민 식기들, 할로겐 조명 아래의 요정들, 그리고 유리병 안에서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있는 커피콩들까지도, 봉다방의 모든 것들이 우릴 보고 있다. 어디선가는 '또 눈물 나게 하면  알지?'라는 소리가 들린다. 보고 싶었다. 정말.


이곳 봉다방.

우리는 또 다른 시작을 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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