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Feat. 슈어 SE425.

by 아스파라거스

한때는 좋은(정확히는 좋다는) 소리에 돈 깨나, 열정 깨나 쏟았던 적이 있었다.


소리는 크게(작게 말고) 두 가지로 결정된다. 그것은 바로, 음원리시버receiver.


음원은 뻔하다. 무손실 무압축에 가까울수록 소리가 좋다(비트bit, 샘플링sampling 등등 더 많은 요소들이 있다지만...). 아무튼, 이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CD를, 지금은 용어도 까먹어 버렸는데, 곱게 원음(wav) 파일로 떠서(리핑ripping? 이었던 것 같다), 다시 무손실 파일로 변환하면 된다.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땐 그것도 재미였다.


다음은 리시버. 디지털 파일을 수신해서 디코딩decoding한 후,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해 증폭 과정을 거쳐 내 고막을 때려 줄 장비. 쉽게 말해 스피커speaker다. 나한테 일반적인 스피커는 사치였다. 음향 장비를 설치할 공간도, 청취할 공간도, 그런 류의 장비를 살 돈도 없었다. 나 같은 뚜벅이에겐, 귀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초소형의 스피커, 이어폰이 최고였다. 문제는, 얘는 내 노력이 아닌, 돈을 들여야만 획득할 수 있는 장비라는 것.

때문에 소리를 향한 내 열정의 역사는 이어폰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신도시였기 때문인지, 고등학교 시절 대부분의 친구들이 CD플레이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좀 빠르던 놈들은 MP3 플레이어를, 희귀하게는 MD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던 놈도 있었다. 나는, 나는 그 어떤 재생 도구도 없었다. 이어폰을 살 일도 없었다.




대학교.

소니, 모델명 모름.


나는 01학번이다. 2001년은 애플에서 아이팟을 세상에 내어놓은 바로 그 해이다. 물론 그뿐이다.

그 시절 나는 극장에서 주운 아이리버를 썼다. 제한된 시간과 지정된 좌석. 찾아 줄 수 있었지만...

버스에서, 걸으면서, 도서관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었다. 주인에게 미안하고 감사할 뿐이다.

그 시절의 이어폰은 국민 번들bundle 급인 소니의 이어폰이었다. 4~5개 이상은 썼던 것 같다. 음질은 미처 인식하기도 전의 시절이었고, 그저 단선 없이 잘 들리기만 해도 행복했다.



사회생활, 첫 번째.

보스, IE


첫 회사를 같이 다니던 간지 넘치던 동생이 무려 15만 원이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이어폰을 썼다. 그게 보스bose의 인이어in ear 이어폰이었다. 뭘 모르던 나는 그냥 폼나게 따라 샀다.

신세계였다. 귓속에 들어와 고막을 직접 때리는 듯한 타격감과 심장을 울리는 중저음은 완전한 새로움이었다. 그렇게 또 4~5년 정도, 인이어 1과 2를 썼다. 점점 과하게 포장된 방방거림에 질려갔다. 목소리를 더 잘 듣고 싶었고, 고음역대를 즐기고 싶었다. 꾸며지지 않은 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사회생활, 두 번째.

슈어, SE425


나름, 고가 시장으로 진입했다. 슈어shure의 SE425, 40만 원 넘는 이어폰. 요즘이야 노이즈 캔슬링noise control이 되는 무선 이어폰들 가격이 기본 30만 원씩 하지만, 10년도 더 전에, 유선 이어폰이 40만 원이 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물론 그것이 내 귀의 성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를 통과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도 레퍼런스reference 장비는 충분히 매력이 있었다. 왜곡 없는 깔끔한 소리도 좋았고 고음역대가 날아가버리는 일도 없었다. 내가 써본 것 중 단연 최고였다. 그렇게 또 몇 년을 썼다.




사회생활, 세 번째.

애플, 에어팟 프로


슈어 이후 몇 년간은 항상 차를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이어폰이 필요 없었다. 그러다 프랑스로 가게 되면서 처음으로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무선 이어폰을 쓰게 되었다. 블루투스buletooth 전송으로 인한 손실은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예전처럼 그렇게 소리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스트리밍streaming 서비스가 무손실 원음을 지원했고, 기술은 10년 사이 말도 안 되게 좋아진 듯했다.

지금은 에어팟 프로airpod pro 1을 거쳐 2를 쓰고 있다. 실리콘 팁tip 때문에 귀가 가려운 것을 제외하면 매우 만족한다.




나는 왜 그리 소리에 집착했을까. 단순히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영역 대의 사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작해야 이어폰이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임피던스impedance가 어떻고, 드라이버driver가 어떻고 하면 난 체 할 수 있었기 때문 말이다.

그래도 즐거웠다. 가성비가 참으로 좋은 투자였다. 여전히 난 음악 없이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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