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도 사람 사는 세상
얼마 전 이모와 이모부가 친구분들과 함께 싱가폴로 여행을 왔다. 이모부가 최근에 팀이 바뀌면서 출퇴근 시간이 많이 여유로워졌다고 말씀을 하시기에, 몇 시까지 출근이냐고 물어봤다. 원래 회사 출근 시간은 9시인데 보통 8시에 회의가 있어서 예전에는 7시 반까지 출근해야 했는데, 팀을 옮긴 이후부터는 8시 10분쯤 출근을 한다고 하셨다. 출근 시간이 9시인데, 8시에 회의를 잡는다고요? 그래서 7시 반까지 회사에 와야 된다고요? 9시부터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한 시간 일찍 8시에 와서 회의를 한다고 하는데, 무슨 이런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나 싶었다. 그런데 또 잘 생각해보니 내가 대기업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 같다. 9시까지 회사 출근인데, 회사에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신입인데 1시간 일찍 와서 앉아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 제일 먼저 와서 할 일이 없어 멍 때리고 앉아있곤 그랬다. 그게 한국 회사에서 신입사원의 패기를 판단하는 방법이었다.
한국 회사들 상태가 저렇다 보니, 어지간한 외국 회사가 한국에서 회사 생활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데 동의한다. 싱가폴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 누구도 내가 회사에 몇 시에 오고 몇 시에 사무실을 떠나는지 관심이 없었다. 복장은 업계마다 다르긴 하지만, 스타트업은 제법 자유로운 편이라 나는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끌고 회사를 다닌다. 직급에 따른 위계질서도 거의 없는 편이기 때문에, 매니저가 됐건 사장이 됐건 이름을 부르고 쉽게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확실히 한국의 회사 생활보다는 합리적이다. 한국에서처럼 ‘무슨 이딴 일이 벌어지는 거지?’라는 종류의 좌절감이나 실망감은 훨씬 덜하다.
하지만 외국에서의 회사 생활이 한국의 회사 생활에 비해 모든 면에서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큰 오산이다. 한국식의 비합리적인 기업 문화를 한 겹 걷어내고 나면 사실 그 안에는 기업형 온정주의와 가족주의가 숨어 있는데, 온갖 비합리적인 일들만 견뎌낸다면 사실 제대로 된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회사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여지는 한국이 조금 더 많다는 생각을 한다. 외국에서 회사 생활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점을 좀 더 주의하면 좋을지 한 번 생각해보자.
외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 다양한 직급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한국에 비해 훨씬 수평적이다. 결국 자신의 상사를 편하게만 대할 수 없는 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국에 비하면 훨씬 더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매니저와 팀원은 업무 상에서만 상하관계를 유지할 뿐 그 이외에는 가까울 경우 친구 같은 관계가 되기도 한다.
다만 업무와 관련해서 매니저의 권한이 막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니저는 가장 가까이에서 팀원의 업무를 지켜보는 사람인 동시에, 그 업무 성과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매니저도 결국 사람이 아닌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싱가폴에서도 이런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평가 시스템이라는 객관성의 탈을 쓰고 있지만 결국 얼마나 매니저의 사랑을 받고 있는가가 평가의 기준이 되기가 쉽다. 반대로 매니저와 사이가 좋지 않다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있다. 싱가폴 회사에서 면접관 경험이 있는 분들에 따르면 매니저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싱가폴에서는 한국에서처럼 대놓고 부하직원에게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저로서의 권한을 이용해서 팀원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결국 이곳도 사람이 사는 세상인 셈이다.
앞서 이곳에서의 회사 생활을 하면서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출퇴근은 자유롭되 그 권리에 온당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칼같이 제재가 돌아오는 곳이 이곳이다. 한국에서는 신입이건 경력직이건 그래도 새로운 조직에게 들어온 사람에게 충분한 교육과 시간을 제공하고,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경력직이란 들어오자마자 바로 일 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싱가폴 회사에서는 보통 3개월 간의 수습 기간(probation)이 주어지는데, 이때는 해고당할 경우 1~2주 만에 짐을 싸고 떠나야 한다. 그리고 수습 기간 이후에도 회사마다 다르지만 짧게는 4주에서 길게는 12주 정도의 사전 통보 기간 이후에는 바로 해고된다. 해고 시점으로 1달 내에 다른 일을 구하지 못하면 바로 싱가폴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업무량 자체도 한국 회사 대비 결코 적지 않다. 출퇴근이 자유롭지만, 성과에 대한 평가를 칼같이 하기 때문에 누가 남아서 일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주어진 업무량을 마치면 퇴근도 자유롭기 때문에 다들 주어진 업무 시간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하고 일찍 떠나기 위해서 노력한다. 업무 중에 여유롭게 일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특히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나왔을 때 고생할 거라고 여기는 부분은 커뮤니케이션이다. 한국 사람들은 주로 상사가 시키는 일에 따르는데 익숙하지 않나. 학교 교육도 그렇게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말이다.
싱가폴에서는 주기적으로 업무 능력 평가가 이뤄진다. 그런데 보통은 이 평가 기준도 매니저와 팀원이 상의를 해서 정하고, 평가 결과에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업무 기여를 더 인정받기 위해 싸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주로 업무 평가는 상사가 팀원에게 일방적으로 하는 것인 경우도 많고, 공정하게 평가가 이뤄진다기 보다는 진급 누락자를 이번에 진급시키기 위해 점수를 몰아주는 일들이 흔하게 벌어지지 않나. 이런 환경에서 익숙해지다 보면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연습이 안되어 있어서 참 힘들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기적 업무 능력 평가뿐만 아니라 매일 혹은 매주 이뤄지는 회의에서도 사람들이 참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는데 익숙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신이 이뤄낸 성과를 이쁘게 포장해서 인정받고, 혹은 자신의 실수를 잘 방어해내는 것도 업무의 범위라고 생각이 든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성과를 내더라도 충분히 인정받기가 힘들다.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데 알아봐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게 사내 정치로 이어지기도 한다. 외국에는 사내 정치가 없을 거 같다고? 이곳도 사는 사람이다. 오히려 정말 사납게 온갖 관계를 이용해서 사내 정치가 일어나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고, 자신의 능력을 잘 드러내고, 조직 안에서 내 평판을 쌓아나가는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