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생활에 질문은 생명
한국에서 개발자가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냐고 묻는다면, 보통은 기획서를 바탕으로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겠다. 회사에는 대게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따로 있고, 기획자가 작성한 기획안을 바탕으로 디자이너가 작업을 하면, 그걸 바탕으로 개발자가 구현한다. 그러니까 실제 서비스를 만들 때 "왜?"냐는 질문보다는 "어떻게?"에 더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기획서가 다 있으니 이건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질문할 필요가 없다. 물론 기술적으로 구현이 어려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에는 일정을 조절하거나 조금 더 쉬운 방법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기획을 혹은 일정을 '협상'하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걸 왜 만드는지는 크게 질문하지 않는다.
나는 개발 경력의 대부분을 스타트업과 프리랜서로 일했는데, 스타트업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면 굉장히 업무 자유도가 높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업무 환경에서도 굳이 기획서가 잘 갖춰진 경우가 아니더라도 무엇을 만들게 될지가 명확한 경우가 많은 편이다. 스타트업에서는 특히 기획서를 꼼꼼하게 작성하는 일은 드물지만 소수의 인원이 넓은 범위의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업무 전체를 파악하고 있거나, 대표가 강한 리더십으로 새로운 기능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고, 혹은 새로 입사한 경우라도 작은 규모가 많은 스타트업 특성 상 프로젝트 자체가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너무 복잡한 경우는 드물다. 프리랜싱을 할 때도 클라이언트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클라이언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오히려 클라이언트보다 업무를 더 이해하면 했지 업무를 파악하지 못하는 일은 드물었다.
개발자와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싱가폴에서 일하면서 놀랐던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싱가폴에서 일해보니 프로젝트에 대해서 놀랄 정도로 문서화를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팀원들끼리 공유하는 폴더에 들어가면 프로젝트의 상세한 배경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는데, 외국에서 일을 해보니 누가 하나하나 옆에 앉아서 설명해주거나 전체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문서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 이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할까? 질문을 한다. 첫 회사에 다닐 때,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번 주에 해야 할 일을 한 문장씩 다섯 문장으로 받아서 놀란 적이 있다. 정말 진행돼야 하는 업무의 제목만 받아본 셈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사용자 활동 데이터 시각화", "각 사용자 별 포인트와 전체 포인트 지급액 정기적으로 비교" 등이 이메일을 통해서 날아왔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워낙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타트업이라 조금 극단적인 예시라고 생각해도 좋겠지만, 저 정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오는 형태로 업무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만약 첫 번째인 "사용자 활동 데이터 시각화"라는 업무를 맡게 된다면, 사용자의 어떤 활동 데이터를 말하는지, 이걸 누가 받아볼 건지, 시각화는 어떤 식으로 해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는 의미다. 물론 데이터 시각화를 한다면 이 부분은 어느 정도 디자인이 따라오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그 데이터가 어디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이걸 어떤 용도로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물어봐야 한다. 그 누구도 알기 쉽게 정리해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다들 바빠도 일을 시킬 때는 오히려 지나치게 상세해서 문제였지, 일을 주면서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일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제대로 질문할 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문서화를 하는 작업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라면 문서로 정리하는 것은 시간 낭비하는 꼴이고, 모르는 내용이라면 담당자와 잠깐 미팅을 잡고 이야기를 들으면 더 빠르지 않냐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업무가 주어졌을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을 찾아가거나, 그 사람들과 회의를 잡는 것이 좋다. 회의가 잡혔다면 어떤 내용을 질문할 것인지 파악하고, 일단 주어진 범위 안에서 최대한 이해를 하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회의에 들어가서 대화 중에 새로 모르는 것이 생기면 배경에 관해서 설명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다. 잘 몰라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해서, 누군가 찾아 와서 하나하나 설명해주지 않는다.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산 나로서도 질문을 제대로 하는 것은 항상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경우에는 회의 중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정리를 해놨다가, 회의가 끝날 무렵이나, 혹은 회의가 끝난 후에 꼭 이해가 안 된 부분을 물어본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일을 엉망진창으로 해놓고 다시 일하는 것만큼 바보 같아 보이는 일이 없다. 모르는 것은 확실히 물어보고, 확실히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회의 중에 애매한 부분이 생기면 다른 방식으로 풀어서 설명을 하고, 상대방의 이해와 나의 이해가 동일한 지 다시 한번 질문을 한다.
만약 이렇게 질문하는 습관이 잘 들어있지 않다면 이곳에서의 생활은 항사 물음표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일을 받았는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누가 와서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싱가폴에서 새로 다니기 시작한 회사에서는 신규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굉장히 재미있는 점은 팀장급이 독단적으로 솔루션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팀원들이 다 같이 모여 충분히 시간을 갖고 사용할 기술이나 서비스의 구조를 결정하기 전에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필요하다면 업무 시간에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한 기술도 각자 공부해서 만나서 서로에게 공유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일에 온전히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 생활에 대한 조언으로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말하는데, 사람은 내가 무엇인가 결정하고 있다고 느낄 때 주인 의식을 느낀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되어서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필요한 부분을 출퇴근 시간에 따로 채우면서 하나 둘 서비스에 대한 적절한 질문을 하고, 내 생각을 보태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자체를 내가 정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이 프로젝트 안에서 벌일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심지어 팀의 매니저는 “나는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조직의 결정을 도울 뿐”라고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말만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새 회사에 출근한 지 이틀 째 되는 날 다른 개발자 면접에 들어갔고 면접이 끝나자 면접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그 날 면접 본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나눴다. 그날도 매니저는 "개발자는 내가 뽑는 것이 아니라, 팀원이 다 함께 뽑는 것"이라며 면접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괜찮다고 말한 개발자만 뽑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다시 온라인으로 코칭을 시작했다. 코칭을 하면서 즐거운 점은 사람들이 정말 각자 자신 만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평소 생활에서는 사실 깊은 이야기까지 잘 나누지 않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코칭의 질문을 통해서 깊은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람은 정말 하나하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사람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 대해서 명쾌하지 않은 점과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점을 해소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한다. 대화 중에 상대방이 말하는 낯선 주제에 대해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귀 기울여 듣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마찬가지로 새로 맡은 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이기 위한 질문이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질문은 모두 관련 주제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나온다. 질문을 통해서 허점 가득했던 논리와 서비스는 채워진다.
질문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다양한 외부 자극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느냐는 그 자체로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그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무관심하게, 또 다른 누군가는 너무나 사소한 이야기에서도 다양한 궁금증을 뽐내고 날카로운 질문을 뽑아낸다.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이 하는 질문 그 자체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