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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코 Jun 04. 2018

다양성 속에서 일하다

당연한 것이 없는 삶

회사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12시가 되었다. 12시만 되면 점심 식사를 먹었던 탓에, 위장(胃臟)님은 12시만 되면 "일을 다 내려놓고 어서 밥을 먹으러 가지 않고 무엇을 하냐?"라고 꾸짖는다. 위장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더 기다릴 수 있을까. 노트북을 덮고 사무실 한편에 있는 식당으로 향한다. 이미 식탁에는 여러 종류의 음식이 오늘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회사에서 도시락을 제공해주는데, 음식이 도착하면 회사 내 메신저로 "fiip"(Food is in the pantry)라는 메시지가 올라오고, 사람들은 알아서 식사하기 시작한다. 보통은 12~2시 사이에 자유롭게 식사를 한다. 오늘은 치킨 스테이크와 오일 파스타 조합의 도시락을 골랐다. 자리에 앉아서 회사 냉장고에 음료수를 꺼내 주섬주섬 도시락을 열고 있으니, 회사 친구들이 하나씩 도착한다. 


내 테이블에는 두바이 친구 하나와 사이공(혹은 호치민, 베트남) 친구 하나, 그리고 싱가폴 친구가 모여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두바이로 이민을 갔고, 대학교는 캐나다에서 나왔다는 친구는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다. 항상 남북 이슈를 나보다 먼저 알고 알려주는데, 내가 한국어로 기사를 검색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추가해주기도 한다. 사이공에서 온 친구는 최근에 부인이 아기를 낳아서 얼른 싱가폴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첫 해외 취업지로 싱가폴을 정했단다. 싱가폴 친구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쪽 해변가 쪽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는데, 얼마 전 회사 팀 활동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가 자기 학교라며 소개해준 적이 있다. 


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누구 하나도 “당연한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서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질문할 때도 조심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자며 강요하지 않는다. 매주 금요일에는 회사에서 밥을 먹지 않고 밖에 나가서 밥을 먹는데, 누구는 자기 점심을 싸오기도 하고, 누구는 약속이 있다며 따로 밥을 먹기도 한다. 배려하되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참 편하다. 


이건 들은 이야기인데, 큰 회사의 경우 매니저 교육을 할 때 “팀원들의 영어를 지적하지 말라”라고 한단다. 우리는 그 사람이 원어민이 아니고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뽑았기 때문에 발음이나 문법을 교정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이 단적으로 이곳의 사람들이 ‘다름’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를 뿐이지 틀리지 않았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곳


1)

싱가폴로 이민을 와서 20년 가까이 살았다는 중국계 개발자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교를 싱가폴에서 나오면서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 분은 2년 후 군입대를 앞둔 아들 하나와 10살 터울의 늦둥이가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막내를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고 퇴근 후 데리고 오기 위해서, 출퇴근 시간을 2시간 앞당겨서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단다. 회사 근무 시간이 원래는 10시부터 6시 반까지인데, 이 분은 8시에 출근하셔서 4시 반에 퇴근하신다. 회사 임원과 직접 이야기했는데, 너무나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단다.


2)

싱가폴에서 대학교를 나와서 영주권을 받았다는 인도인 친구 한 명은 최근에 둘째 딸을 하나 낳았다. 싱가폴 최대 은행에서 PM으로 일하는 이 친구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 수시로 뭄바이로 향했다. 아내가 출산을 한 주에는 2주 동안 뭄바이에서 생활했고, 그 이후에도 틈틈이 며칠 씩 휴가를 쓰고 다녀오곤 했다. 입사한 지 3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가족을 위해서 휴가를 쓴다. 지금은 출산 때문에 가족이 인도에 있지만, 계속해서 싱가폴에서 같이 살았다는 이 친구는 싱가폴에 참 자녀를 키우기에 좋은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집에서 24시간 함께 살면서 집안일과 아이를 돌봐주시는 분들을 70~100만 원 정도에 고용할 수 있다. 싱가폴 정부가 주위의 동남아 나라에서 이런 분들을 적극 유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도 도와주시는 분에게 아이를 잠깐 맡겨놓고 부부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훨씬 더 건강하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서 좋다고 한다. 그래서 첫째를 키울 때 너무 편했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아내도 첫째를 낳고도 계속 일을 했고, 둘째 출산 후에도 싱가폴로 돌아와서 곧 일을 시작할 거라고 한다.


모든 것을 잘하지 않아도 되는 삶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을 되돌아보면 모든 방면에서 잘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다. 회사 생활이 한 개인의 삶에 너무나 큰 부분인 것은 물론이고, 조직도 개인에게 회사 생활이 전부이길 강요한다. 일을 잘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회식에 빠지지 않고 분위기를 살펴서 알아서 일도 척척하는 ‘사회생활’도 회사 생활의 일부가 아닌가? 이것은 마치 한국 교육에서 말하는 ‘전인교육’의 연장 선상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사람들은 능력이 뛰어나야 하지만, 동시에 조직 생활을 잘하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다른 이곳은 ‘전인교육’이 지향하는 완전한 인간상을 공유하지 않는다. 각자의 종교가 다르고, 각자의 문화가 다른 이곳에서, 혼자 밥을 싸와서 먹어도, 점심시간에 따로 나가서 운동을 하고 돌아와도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한테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된다. 그냥 일만 잘하고 집에 가면 안 될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서 좋은 사람이어도 충분할 거 같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당연한 것'이 없는 이 곳, '가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 곳이 나는 참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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