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설 사람 될라꼬예
남편이 주말에 친구로부터 '상추'를 받아왔다.
새로 만나기 시작한 여자친구가 '주말농장' 에서 수경재배한 상추를 나눠줬단다.
남편에게 친구보고 "다른 친구들에게 나눠줘라" 라고 말하라 하니, "같은 동네 사는 친한 친구"라서 특별히 챙겨줬다는 것이었다. 그냥 상추가 빨리 자라는 걸 알고 있기에 조금 받아오려니 했는데, 커다란 검은 봉지에 가득 채워진 3봉지의 상추를 보니 나는 간헐적으로 느끼던 '시골정서' 가 떠올랐다.
요즘 같은 시대야 금방 기차와 버스만 타면 서울로 입성할 수 있는 시대라 서울사람과 지방사람을 나누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서울에 올라와 경기 서울에만 살았던 남편을 만나 결혼해보니, 내가 갖고 있던 '시골 사람의 정서'와 남편이 갖고 있는 '도시 사람의 정서'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지금은 도시에 살고 있지만, 시골에서 자라온 엄마 아빠에게 '서울'은 딸 혼자 머물기엔 무서운 동네였다.
왕복 3시간을 방불케하는 등하교길이라도 서울로 대학을 간 딸내미를 혼자 살게 두지 않았다. 나는 이모집에서 그렇게 (버스를 타고 인천지하철을 타고 다시 1호선을 타고 다시 2호선을 타고서 내려서 마을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는 과정이 있었어도) 1년을 학교를 다녔다.
아침 9시 언더위에 있는 교양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는 고3때만큼 일찍 일어났다. 1분이라도 늦으면 문이 닫혀서 강의 출석이 안되므로 열심히 지하철 시간을 맞추고 최단시간의 지하철 타는 문을 찾으면서 계단을 오르고 사람들에게 밀리고 치이면서 다녔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런 일은 너무 당연했다. (이 부분이 내가 느껴지던 차이점이다)
택배의 '택배비'가 아까워서, 짐을 한가득 들고 지하철과 기차를 탔고,
명절에는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서 천안까지 서서 지하철을 타고 2시간 넘게 내려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 자취를 희망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전근 신청을 하여 서울로 올라왔고, 그러면서도 나는 한동안 코인세탁방이 나타나기전까지 꽤 오랫동안 이불빨래 거리를 들고 기차를 탔다.
그렇게 서울 지하철에서 지갑을 빼이고, 명동에서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하면서도
한강을 지날때마다 나는 서울에 와있음을 느꼈고 '살아있음'을 느꼈다. 한강이 나를 더 열심히 살 수 있게 했다.
아빠는 내가 서울에서 집계약을 해야할때 사촌언니를 부르거나 서울에 살고 있는 새언니를 부르라고 했다. 나름대로 아빠가 생각하기에 '어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녀들을 부를 생각이 없었고, 결국 불안한 아빠가 서울로 올라와 계약을 했다.
남편의 집은 핵가족화가 확실히 되어있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나는 '대가족적인 사람' 이었다.
나는 그걸 내 속에 자리잡은 '시골정서' 라고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한번도 살면서 내가 '대가족' 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사촌동생들과 같이 인천 이모집으로 종종 놀러를 갔다. 결혼한 이후로는 잘 가지 못했지만, 그전에는 종종가서 이모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이모집에 전달하는 엄마의 전달품 (장아찌 등등)의 심부름을 하거나 혹은 이모가 엄마에게 전하는 전달품(영양제) 등을 날랐다.
이 과정이 남편은 신기하다고 했다.(말로 신기하다고 하고 아마 '이해가 되지 않는다'가 정확한 표현일듯)
나는 그때까지 생각할 생각도 못해본 그런 지점이었다.
요즘은 쿠팡배송으로 새벽같이 배송이 날라간다. 그게 더 저렴하고 빠르고 합리적이다.
물론 내가 물건을 전하고 전달하는 매게체가 되었을때는 쿠팡배송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꼭 전달해야하는 물품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먹어보니 좋더라 하는 혹은 우리집에 온거를 나눠주고 싶은 '시골감성' 인 물품들이 많았다.
동네에 우연히 뒷집으로 남편 친구(상추를 준 친구)가 이사를 왔었을 때. 오며가며 마주쳤는데, 슈퍼에서 고기를 사서 가던날 마주친 남편친구에게 집에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남편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나는 그냥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된다고 했다. 남편은 "왜 내친구를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부르냐" 고 했다. 듣고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냥 시리얼먹는다고 하는 친구가 안쓰러웠을 뿐인데, 생각해보면 그럴필요까지(심지어 남편보다 돈을 더 잘번다)는 굳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 와서 도시적인 이미지로 커리어우먼 옷을 입고 회사를 출퇴근하고 가로수길을 가고 강남에서 옷을 사고 테라스카페에서 시티뷰를 즐겨도, 나는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시골정서' 를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시골에 살지 않았는데도, 우리 부모님이 살고 있던 시골의 정서를 커오면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렇게 차를 타고 가면서 온갖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부모님을 보며
"그만좀 해 알아서들 잘 살아. 요즘은 서로 상관안하는게 예의야" 라고 말하는 나의 속안에는 '시골정서'가 깔려있다.
내 속의 '씨앗'이 시골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어디 최씨인지, 어느 종파인지 따지는 건가?
외국에서는 그렇게 태어난 집안을 이름에까지 넣는건가?
나는 내 속의 '시골정서'가 부끄럽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가끔 나의 넘쳐나는 '오지랖 정'을 도시적인 남편이 잡아주고 있을 뿐.
그래서 열심히 도시 바람을 맞고 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시골사람이라서
내는 설 사람 될라꼬예-
덧붙이자면_
우리 엄마 아빠도 공부는 다 도시에 나와서 한 덕에 그들도 완전한 시골사람은 아니라는 점.
아빠는 어릴때 밭을 매봤지, 엄마는 농사를 지을일이 없었다.
어렸을때 빼고는 학창시절부터 계속 도시에 나와서 살았다는 점이 함정이다.
"어디서 소똥스멜 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