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K-장녀)가 행복해지려면 필요한 것
티비에 엄마를 닮은 배우가 드라마를 새로 시작했다. <결혼 작사 이혼 작곡>이다.
소싯적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엄마는 김보연 배우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볼살이 다 빠져버려서 멀어졌지만, 그래도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그런 엄마와 나가면 사람들은 곧잘 "아빠 닮았나 보네~"라는 소리를 사람들을 해댔다.
그런 나는 아빠랑 나가면 "엄마 닮았나 보네"라고 하고
엄마 아빠랑 다 같이 나가면 결국 "할머니 닮았나 보네"라는 소리까지 듣고는 했었다.
사실 엄마를 닮은 김보연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가 막장 드라마여서, 나의 사고관과도 많은 차이점이 있어서 보기가 힘들 때도 있지만, 딴짓하면서 틀어놓고 김보연 배우를 보고 있다. (진짜 엄마는 보러 안 가면서 닮은 배우를 보고 있는 꼴이라니.)
나보다 예쁜 엄마를 둔 딸로서 나는 엄마가 자랑스러웠지만,
나는 엄마처럼 살 자신은 없었다.
엄마가 '엄마'로 살던 시대에는 '자식' 이 훈장이자 나의 삶의 증거였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내가 잘 살아왔음이요. 자식이 잘 안 되는 것이 내가 헛되게 사는 시절이었다.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맏이가 일찍 공장에 나가 일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헌신하며 살고 있다. 그 전만큼은 아니나, 나의 직업과 커리어를 잃지 않기 위해 엄마들도 노력하고 더불어 안타깝게도 친정엄마 혹은 시엄마들이 또 희생을 한다.
우리 집은 40살이 넘어서 낳은 막둥이를 엄마는 버겁게 키웠다. 흔히 '사춘기'와 '갱년기'가 싸우면 '갱년기'가 이긴다고 하던데, 우리 집은 예외였다. '사춘기'가 이겨서 '갱년기'가 소리 소문 없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너무 자식한테 올인을 해. 엄마도 이제 엄마의 인생을 살아. 나가서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우고 하고 싶은 것도 좀 해. 엄마 선생님 하고 싶었다면서, 과외를 하던가"
엄마는 무섭게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내왔다
"가르치려고 들지 마라"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너는 너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야"라고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엄마가 안타까우면서 답답했다. 사실 그 말을 하면서도 엄마가 쉽게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내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왜 엄마에게만 답답해했을까. 잠깐의 후회가 스치듯 지나가고, 엄마에 대한 미안함은 현생을 이길 수 없었다.
엄마 말대로 나는 '이기적인 X'였다. 내 생이 바빴고, 슬픔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엄마의 인생도, 동생의 인생도 구제해줄 만큼 내가 여유가 있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도, 마음적 여유는 더 없었다.
(사실은 방황하는 막둥이를 잡으러 새벽에 서울에서 본가로 내려가기도 하고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 자식이 아니므로 내 동생을 교화시키는 것을 포기했다. 그 누구도 스스로가 아니고서야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서울에서 서울살이에 적응을 하느라 아등바등 대면서 본가에 자주 가지 않았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 가서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는 동안 막둥이와 씨름을 하는 엄마는 겨우 막둥이를 고등학교를 졸업시켜 대학을 보냈다. 드센 자식들이 순둥순둥 한 부모 밑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엄마는 힘들 때마다 종교를 찾았다. 막둥이를 수도권의 대학으로 밀어 넣은 후에 엄마는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을 위해 과외 봉사를 시작했다. 교회에서 매주 김밥을 말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군부대에 보냈다. 자식처럼 그들을 사랑해주었다.
엄마는 학교 보건교사로 커리어를 시작하려다가 결혼과 함께 가정주부가 되었다. 같이 학교에 취직했던 다른 친구는 계속 일을 했고, 정년퇴임을 했다. 가끔 엄마는 "나도 그냥 계속 다닐걸 그랬나"라는 바람에 흘러가는 소리를 했다.
그렇게, 엄마는 이모네 애기들을 등 하원 시키고, 초등학생 첫째의 공부를 봐주면서 틈틈이 다른 집(소외계층, 저소득층) 아이들을 방문하여서 공부도 알려주고 생일도 챙겨주었다.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정서적인 교감을 주려고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친척집에 맡겨졌거나 부모가 이혼한 후 할머니에 맡겨진 아이들이었다. 사랑이 고팠던 건지 어른들이 밥을 잘 안 챙겨줬던 건지 늘 배고파해서 간식을 엄마가 늘 챙겨갔다.
엄마가 봉사활동을 하고 일지를 매일 쓰고, 아이들의 생일을 개인 돈으로 케이크를 사 가서 챙겨주고, 간식도 챙겨주고 책도 사주고 지극 정성을 다하고 있을 때
나는 서울에서 들어간 회사를 뛰쳐나오고 들어가서 뛰쳐나오고를 반복하면서 고용주의 마음과 고용된 사람의 마음은 천지차이구나. 회사에 내 마음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를 깨닫고 한껏 시니컬 해지고 있었다.
동창을 만나 엄마가 나보고 "이기적이래"라고 했다며
깔깔거리면서 이야기를 했다.
동창은 나에게 "너 그럼 잘 살고 있는 거야"라고 했다.
다니던 회사에 글을 정말 잘 쓰는 언니가 있었다. 예민한 감성을 가지고 있어서 글도 참 잘 썼고, 사장도 인정해주는 사람이었다. 언니에게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쌍둥이 남동생이 있었다. 몸이 점점 크고 18세를 지나면서 복지관에서는 힘이 세진 남동생들을 잘 받아주지 않았다. 힘으로 이길 수 있는 복지사들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생들만 집에 두고 모두 나갈 수 없었다.
언니는, 학창 시절 사라진 동생들을 찾기 위해 새벽에 판자촌과 사창가까지 막 헤맬 때 무서워서 손이 벌벌 떨렸다고 했다. 위치추적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디라고 알려주지 않고 어디 근처라고 해서 동생들이 잘못될까 봐 밤새도록 동생을 찾아다니고, 아침이 되면 학교에 갔다고 했다.
그래서 20살이 넘고 30살이 넘도록 제대로 된 연애를 많이 해보지 못했다. 내 생이 바빴고 동생들을 맏이로서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명예퇴직을 하고 집에 있게 되면서부터 언니는 독립을 하고 그제야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종종 동생들에게 전화가 오고 마음이 괴로운 언니가 남자 친구를 달달 볶았지만, 그래도 그제야 언니가 웃는 것 같았다.
언니에게는 쌍둥이 동생보다 먼저 만난 여동생이 있었는데, 둘째인 여동생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일찌감치 독립을 해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 있었다. 언니는 늘 그 여동생이 "이기적인 X"라고 했다. 엄마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다. 동생을 찾을 때도 회사 출근해야 한다며 집에 가버린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첫째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첫째들은 엄마가 힘들 때 독립을 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모르고 부모가 되어야 안다는데.
어차피 아무리 해도 자식들은 이기적이고, 하해와 같은 부모의 마음을 따라갈 수 없다
최고의 효도는 "내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그게 좀 이기적일지라도.
이기적이라는 게, 집에 있는 돈을 들고 튀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기적인 X 소리를 듣는 나도, 엄마가 봉사를 하러 가는 날에 들고 가라고 과자를 모아서 갖다 준다. )
적어도, "착한 딸" "K-장녀"로 살아가고 있는 책임감에 발목 잡혀 있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남자의 경우에는 착한 아들, K-장남)
눈치 보지 말자.
엄마의 삶이 내 삶이 되게 하지 말자.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자. (어차피 엄마는 나를 안 미워한다. )
현명하게 이기적인 X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