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이프콘텐츠를 소개합니다 ④
너무 뻔한 대답이라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나한테 관심이 없나? 대화하기가 싫은가? 뭐 이런 식의 오해. 아니면 '노잼 인간'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다. 상대가 애서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겠다만, 책 보다 휴대폰을 압도적으로 더 많이 보는 시대 아닌가. '여가시간의 독서'는 고리타분한 답변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
"서핑하러 양양에 가요."라든가 "위스키 바에 가는 걸 좋아합니다."라는 답변이 훨씬 흥미롭게 들린다. 대화를 이어가기에도 이 편이 더 나아 보인다. 트렌디한 주제라는 점에서. "그래요? 저 서핑 배우고 싶었는데…"라고 답하면 주거니 받거니 티키타카가 되고, 분위기가 화사해질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노잼 인간을 자처해보려고 한다. 휴식하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올해로 12년째, 전자책 리더기를 쓰고 있다. 나의 첫 리더기는 '비스킷'이었고, 아이패드를 거쳐 '카르타'에 안착했다. 거의 8년 정도 카르타 유저로 살았다. 전자책 리더기 유저로 살면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기도 했다.
옛날 옛적부터 전자책 리더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딱 하나. '누워서 책 읽기'를 실현하고 싶어서였다. 맛있는 것과 맛있는 것을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지듯,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합쳐지면 '따블'로 더 좋아질 테니.
지금 쓰는 리더기는 리모컨만 누르면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휴대폰 거치대에 전자책 리더기를 고정한 후 리모컨만 누르면 침대에 누운 채로 독서가 가능하다.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독서의 기쁨은 고스란히 충전된다. 기특하고도 또 기특한 독서법이자 휴식법이 아닌가. 책을 읽다가 스르륵 잠이 들면? 시쳇말로 ‘개이득’일테고.
책을 읽을 때마다 느낀다. 몰랐던 걸 알아가는 재미! 다른 책에서 봤던 정보가 지금 읽는 책의 정보와 합쳐질 때의 짜릿함. 정보와 정보가 새로운 관계로 연결될 때의 희열. 이 찰나의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서 자꾸만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는가? 양양에 가지 않고도 서핑을 배울 수 있다. 굳이 위스키 바에 가지 않아도 위스키의 역사부터 위스키를 즐기는 법까지 모조리 알 수 있다. 어떻게? 책으로. 기왕 노잼 인간이 되기로 한 김에 고백하자면, 서핑도, 위스키도 방에 가만히 누워서 글로 배우는 게 훨씬 즐겁다는 사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소설가 모리사와 아키오의 에세이 <사치스러운 고독의 맛>에는 기차를 탔다가 우연히 마주친 한 노인의 ‘대단한 독서법’ 이야기가 나온다. 그 노인의 책은 절로 시선이 갈 만큼 온통 형광펜과 밑줄로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도 모자라 책 귀퉁이의 모서리는 반 이상 접혀있었고, 책을 읽는 도중에도 검은색 볼펜으로 물결선을 긋고 있더라는 것. 어찌나 마르고 닳도록 책을 읽었는지, 물에 젖어 부푼 듯 책의 부피도 커져있었단다.
모리사와는 '열성적이고 집요하게 읽힌 그의 책'을 보면서 동경심이 피어올랐다며, 자기만의 독서법을 가진 사람의 자유로움과 행복감에 감화되었음을 밝혔다. 나 역시 그랬다. 그 노인의 부풀어 오른 책을 상상하면서 같은 대목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신선했다. 책 전체에 밑줄을 그으며 읽는 독서법은 그 어디에서도 보고 들은 적이 없기에. 다짐했다. 지금보다 더 격렬하고 알록달록하게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면서 책을 읽어야겠다고. 중고서점에 팔아버릴 목적으로 책을 아껴 읽지 말아야겠다고도.
삶의 의욕이 사그라들 때마다 책을 찾아 읽었다. 절망에 빠진 요양인을 조건 없이 구원해주었다. 단 한 번의 배신 없이 번번이 큰 위로를 줬던 것도 책. 하여,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책 곁을 맴돌았다. 특히 음악가들의 집요한 연습론에 마음을 뺏겼다. 다 포기하고 싶음 마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끝내 무대에 오를 때, 어김없이 벅찬 감동이 차올랐다. 나도 음악가 인양 그렇게 매일을 견디며 살았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마음이 요동친다. 좋은 글을 읽으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좋은 책을 읽으면 누워있다가도 몸을 벌떡 일으키게 된다. 째깍 삶의 에너지가 채워져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운동을 시작하든, 요가를 하든, 글을 쓰든 몸을 움직이게 된다. 그러면서 은근한 기대를 품는다. 내 삶이 좋아지리라는. 아니면 적어도 내 자신이 달라지리라는 희망을. 이건 정말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맛 아닌가. 그렇게 자꾸만 빠져들게 된다. 책 속에.
휴가를 부추기던 여행작가였다. 번아웃을 방치하다 희귀병 환자가 되었다. 3년 동안 요양하며 깨달았다. 우리 삶엔 가끔의 휴가보다 매일의 휴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나답게 일하고, 나답게 잘 쉬고, 나답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화로운삶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날마다 일상의 작은 기쁨을 충전하면서 ‘잘 쉬는 기술’을 궁리하며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