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p 생활독서 트래커로 기록하기
수많은 철학자가 말했다. 망각은 축복이라고. 생각이 나를 곧 괴롭게 하나니, 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괴로운 생각을 지우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초보 독서가인 나에게는 읽은 내용을 잊어버리는 게 더 괴로운 일이 되었다. 읽은 티를 내고 싶다고! 읽은 내용을 내 생활에 요긴하게 써먹고 싶다고! 남는 게 있어야 동기부여가 된다고!
이런 나의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읽은 책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읽었냐는 듯 처음 만난 사이처럼 굴었다.
책의 핵심을 까먹기엔 아까웠고, 읽은 내용을 오래도록 활용하길 원했다. 전략이 필요한 순간. 필사를 대신할 새로운 기록법을 만들었다. 다섯 가지 항목에 맞춰 책의 핵심 내용을 기록하는 <1P 생활 독서 기록법>이 그것.
기록법을 달리해 정리와 기록을 제대로 하게 되면서 독서의 질이 확 달라졌다. 책의 핵심을 수월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아이디어가 샘솟으며 업무와 일상에 뜻밖의 활력이 생겨났다. 그런데 읽은 책이 하나둘씩 쌓여가면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다 기억나는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찰떡같이 이해해 주실는지. 책의 표지도, 제목도, 어디쯤 무슨 내용을 써놨는지도 다 알겠는데 내용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왜 말을 못 하는 건지.
아는데 안다고 말하지 못하는 답답한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렇다고 책 읽기를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 갑갑한 상황에서 나는 책 읽기의 짜증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저장된 기억을 끄집어내지 못하는데서 오는 짜증. 했는데 안 될 때의 좌절감, 반복되는 피로감까지. 예전의 나였다면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보단 '포기'를 택했을 터.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법이라고 믿어버리면 그만이니까.
한데, 독서 근육이 붙은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지 않나. 아로새겨진 끈기와 인내가 나를 문제 해결의 길로 인도해 주었다. 짜증을 가라앉히며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음은 물론이다. 새삼 책 읽은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은혜 갚은 독서활동이라고나 할까.
읽은 걸 또 까먹고야 마는 문제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깨달았다. 공부한 걸 까먹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인 문제라는 것을. 심각해졌던 마음이 풀어졌다. 읽고 쓴 내용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게 당연했으니.
독일 심리학자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이론을 떠올렸을 땐 전보다 마음이 훨씬 가뿐해졌다. 학습 후 20분이 지나면 40% 정도의 기억이 사라지고, 일주일 이후에는 20% 정도의 기억만 남는다는 연구 결과에 묘한 위로를 받기도 했다.
공부는 안 하고 온갖 종류의 공부법만 수집했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독서도 교과서를 공부하듯 해야 한다는 것.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면서 장기기억으로 저장했더라도, 머리에서 끄집어내는 '출력' 과정이 '반복'되지 않으면, 지식을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배웠다. 때문에 수많은 독서 전문가들이 지식의 '출력'을 위해 서평을 쓰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나의 망가진 뇌를 탓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서평 쓰기 역시 내게는 강렬한 출력 활동이 되지 못했다. 그 말인즉슨, 기억을 지속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뜻.
이도저도 안될 땐? 탓하기 전에 직접 우물을 파면된다.
‘읽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꺼내는 것까지가 독서다.’라는데 생각이 닿았다. 어떻게 '머릿속 꺼내기'를 지속적으로 반복할 수 있을까? 번거롭지 않고 쉽게 반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등등. 떠오르는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형광펜을 꺼내 들었다.
▌편하게 반복과 출력을 지속하기 위하여
A4 용지에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5칸을 만들었다. 제일 앞에는 날짜를 쓰고, 그 옆으로는 책 제목을 썼다. 그다음 칸에는 핵심 내용을 쓰고, 또 다음 칸에는 키워드를 썼다. 마지막 칸에는 핵심내용과 키워드를 작성하면서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인사이트를 기록했다. 그런 다음 <생활독서 트래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의 독서 기록을 잊지 않고 따라가 보겠다는 의미에서.
전 날 읽은 책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매일 아침 루틴에 트래커 작성하기를 추가했다. 핵심 내용 정리가 끝난 다음 날 아침에는 <생활독서 트래커>를 쓰면서 반복의 누적 횟수를 늘려나갔다.
그러니까 월요일에 책을 읽었으면 화요일에 책의 핵심내용을 정리한 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생활독서 트래커>를 작성하는 것. 수요일에는 날짜, 제목, 핵심내용을 쓰고, 목요일에는 키워드를 쓰고, 마지막 날에는 인사이트를 쓴다.
그다음 주 토요일에는 트래커를 보면서 지난주 읽은 책의 핵심 내용을 또다시 떠올려본다. 트래커에 작성한 책 제목만 보면서. 혼자 보는 시험처럼 말이다.
이렇게 출력과 반복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핵심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게 되었다. 잊어버리지 않는데서 그치지 않고, 나를 변화시키는데도 매일 써먹는다.
이렇게까지 책을 읽어야 한다고? 과거의 나는 이렇게 물었을 테지. 독서 트래커를 쓰는데 드는 시간이 1분이 채 안 되는데 반해 얻는 효과가 반영구적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효율적인 독서행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모든 면에서 나아진다. 쌓여가는 지식 덕분에 이해력이 좋아지고,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지는데도 놓치는 내용이 별로 없다. 집중력, 기억력, 어휘력 향상도 당연지사. 책을 읽을 때마다 스마트폰이나 게임 같은 딴짓을 하고 싶은 충동이 사라졌다. 진료실에서 그간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환자로 돌아왔고, “어, 어, 어, 그거 있잖아.”의 빈도가 엄청나게 줄었다.
멍청해진 기분이 들 때마다, 요즘 책을 얼마나 읽는지 살핀다던 친구에게도 <생활독서 트래커> 쓰기를 권했다. 매일 복습을 하게 되니 자동으로 '멍청함 방지'가 된다고 소감을 밝혀왔다. 독서하는 뿌듯함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나?
읽고, 쓰고, 그 내용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 독서할 맛이 난다. 절대 까먹지 않고 남는 게 있는 독서를 원했다면? <생활독서 트래커>로 새로운 독서생활을 시작해 보시길!
읽었지만 자꾸만 까먹어서 독서를 지속할지 말지의 기로에 서 있다면? 오늘부터 <생활독서 트래커>를 사용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A4 용지에 줄을 긋기만 하면 바로 시작할 수 있거든요.
아침마다 줄 긋는 일도 귀찮아진 저는 파일로 만들어 출력해서 쓰고 있어요. 필요하신 분이 있나요? 댓글로 알려주심 공유해 드릴게요!
이소요. 생활독서를 시작한 후, 새 삶을 살게 된 기념으로 스스로 지은 이름. 소요(逍遙)하듯 살겠다는 의지로 개명을 결심했으나 필명으로만 쓰고 있다.
번아웃을 방치하다 희귀병 환자가 되었고, 요양생활 3년 만에 번아웃과 작별했다. 인생은 생활력이 전부라 믿으며 생활력 코칭을 전파한다. 생활력이란, 직장 '생활'과 일상 '생활'을 돌보고 지키는 힘. 사명감을 갖고 생활력을 높이는 생활밀착형 자기돌봄 콘텐츠를 만드는 데 골몰하는 중이다.
한 때 3권의 여행 책을 썼고, 생활력을 주제로 퍼블리에 글을 썼다. 당신의 번아웃만큼은 온몸으로 막고 싶다는 마음으로 <번아웃, 아웃 코칭 워크숍>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