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회사에 한번 오셔서 같이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회사로의 이직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팀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입사 전, 차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면접장에서 본 딱딱한 모습이 아닌, '진짜' 리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빈손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 내가 몸담게 될 조직에 대한 나의 열정과 고민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며칠 밤을 고민해 5가지의 질문을 준비했고, 미리 팀장님께 문자로 전달해 드렸다.
"네, 좋습니다. 주신 질문들을 읽어보니 OO님의 생각과 철학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네요. 그럼 당일에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나눠보죠."
그 답변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내 준비가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우리 사이에 '대화'라는 것이 통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속 당일,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를 맞이한 건 따뜻한 차 한 잔과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다. 회의실의 모니터에는 팀장님이 준비한 수십 장의 PPT 슬라이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질문 주신 다섯 가지 잘 읽어봤습니다. 우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을 먼저 드릴게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팀장님은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이 이 회사에서 쌓아 올린 성과, 화려한 이력, 그리고 본인이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0분, 30분, 1시간….
나의 5가지 질문은 그 화려한 무용담 속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못했다.
팀장님은 내 눈을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허공에 뜬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는 대화를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대함을 들어줄 '관객'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 제가 다음 약속이 있어서… 이렇게 시간이 많이 필요할지는 몰랐습니다, 팀장님."
2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그 끝없는 독백을 멈출 수 있었다. 팀장님은 그제야 시계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아이고,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허겁지겁 회사를 빠져나오는 길, 머릿속이 멍했다. 2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들은 걸까?
내가 밤새 고민한 질문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입사 전의 설렘 대신 묵직한 걱정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듣기'가 되지 않는 리더와의 커뮤니케이션.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회사 생활의 예고편을 본 것만 같았다.
그날 내가 느낀 허탈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몇 가지로 정리가 되었다. 내가 준비한 질문은 단순한 물음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이 조직에서 잘해보고 싶다"는 신호이자,
"당신과 주파수를 맞추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리더가 그 질문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내는 순간, 구성원의 열정은 갈 곳을 잃는다.
많은 리더가 착각한다.
리더는 '말하는 사람'이고, 비전을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진짜 리더십은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특히 새로운 구성원을 맞이할 때,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품고 온 '질문의 무게'를 재어주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입사 전의 설렘 대신 묵직한 돌덩이를 얹은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단순히 내 질문이 무시당했다는 기분 나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곰곰이 곱씹어 보니, 그 2시간의 독백이 남긴 허탈함에는 더 본질적인 이유들이 숨어 있었다.
첫째, 나는 그 자리에 '동료'가 아닌 '관객'으로 초대되었다.
내가 밤새 고민해 준비한 5가지 질문은 "내가 이 조직의 미래를 함께 고민할 파트너가 되고 싶다"는 시그널이었다. 하지만 팀장님은 나를 파트너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했던 건 함께 일할 동료가 아니라, 자신의 무용담을 듣고 박수 쳐줄 '관객'이었다. 나의 존재가 철저히 그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사실, 그것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둘째, 나는 '미래'를 물었는데 그는 '과거'로 답했다.
나의 질문들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가치를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미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팀장님의 시선은 온통 "내가 왕년에 이만큼 했다"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었다. 리더는 앞유리를 보며 운전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백미러만 쳐다보며 자아도취에 빠진 운전자 옆에 탔을 때의 그 불안감. 과연 이 사람 밑에서 나의 미래가 그려질 수 있을까? 기대는 순식간에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셋째, 가장 잘 보여야 할 순간에 '최악'을 보았다.
입사 전 미팅은 연인으로 치면 '소개팅'이나 다름없다. 서로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가면을 써서라도 배려해야 하는 시기다. 그런데 가장 조심해야 할 첫 만남에서조차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쏟아낸다면, 익숙해진 뒤의 모습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날의 2시간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앞으로 내가 겪게 될 '지독한 불통의 예고편'이었다.
그날 나는 뼈저리게 배웠다. 리더의 권위는 화려한 언변이나 과거의 성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동료가 품고 온 '질문의 무게'를 재어주고, 기꺼이 자신의 귀를 내어주는 '침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그날 2시간 동안 나의 상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외로운 나르시시스트를 만났다. 그가 쏟아낸 무용담의 양만큼, 내가 가졌던 입사의 설렘은 정확히 그만큼 휘발되어 사라졌다.
나는 훗날 누군가의 리더가 되었을 때,
절대 질문을 들고 온 사람을 관객으로 만들지 않겠다.
그렇게 나의 '리더십 오답 노트' 첫 페이지가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