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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04. 2023

(1) "삐삐" 무선호출기, 이동통신을 깨우다

1부. 무선호출기 '삐삐'

“멀리 있어도 보고 싶을 때 호출해! 내 삐삐는 012니까!”


배우 이정재가 맨홀을 빠져나오며 외쳤던 말이다. “누가 삐삐 쳤어?”라는 카피의 광고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포스터에 박힌 글귀다. 지하에서도 잘 터지는 무선호출기를 홍보하기 위함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K-콘텐츠 위상을 높인 배우 이정재가 10대 마지막에 찍은 광고이기도 하다.  


배우 이정재가 배우 이정재가 광고모델로 등장한 한국이동통신 012 홍보포스터(좌)와 이후 30주년 기념 광고촬영을 한 모습 [사진=SKT인사이트]

한국전기통신공사 출범


1980년 초. 체신부는 통신사업을 관할하는 조직이 커짐에 따라 어려움에 직면했다. 관료적이고 고착화된 조직 구조상 업무 추진 방식이 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약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이동통신 사업과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따랐다. 게다가 경영 관리의 문제점마저 드러났다.


이에 따라 체신부는 통신사업의 공사화를 검토했다. 그렇게 ‘통신사업 경영체제 개선방안’이 완성됐다.1) 이 방안은 대통령이 1980년 12월 19일 재가하면서 본격화됐다. 통신사업의 공사화가 최고자에게 승인을 받으니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발 빠르게 움직인 체신부는 이듬해인 1981년 3월 14일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을 제정2)하고 공사 명칭 역시 법과 동일한 ‘한국전기통신공사(현재 KT)’로 정했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그 당시만 해도 국내 기업 중 역대 최대 규모였다. 설립자금 2조 5천억 원. 전액 모두 정부가 출자했다.3) 사원 역시 3만 5천87명에 이를 정도였으니 그 수준이 짐작됐다. 


1982년 1월 4일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4)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출발은 화려했다. 단기간 내 그간 적체됐던 여러 통신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특수서비스 도입하고 광통신 매설하는 등 신속한 정보통신화를 이뤄냈다.


KT 광화문 사옥 130주년 기념 촬영본. KT의 전신은 1982년 문을 연 한국전기통신공사다. [사진=KT]

페이저·포킷벨·비퍼, 그리고 '삐삐'


국내 이동통신의 시작점을 잡는데 있어 여러 이견이 있다. 여기서는 이동통신 세대별 상용화 근거를 기준 삼았다. ▲네트워크 인프라 구축 ▲지원 단말 ▲고객 서비스 등 주요 조건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일반인에게 대중적으로 보급된 시점으로 제한해보자면 ‘무선호출기’ 사례가 가장 먼저 꼽힌다. 


‘무선호출기’는 국내서 호출음을 의성어로 표현한 ‘삐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서양에서는 영어 이름 그대로 ‘페이저(Pager)’이라 부르기도 하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호출음을 따 ‘비퍼(Beeper)’라 불렀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주머니에 쏙 들어간다고 해 ‘포킷벨(Porket Bell)’, 중국에서는 단순한 형태의 ‘BP기’라고 칭했다. 국내서는 정부 보고서나 사업 문서 등에서 무선호출기와 영어를 혼용해 사용했다. 언론에서는 ‘담뱃갑보다 작은 휴대신호기’라고 소개했다. 


무선호출기 서비스는 체신부가 1982년 무선호출 서비스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후 같은 해 12월 15일 한국전기통신공사(현재 KT)가 실제 서비스를 상용화했다.5) 


현재 건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동통신 장비와는 달리 무선호출기 서비스는 서울시내 6개 지역에 기지국(안테나)뿐이었다. 서울 을지 전화국에 설치된 무선호출 취급국의 중계를 통해 전송했다. 당연히 서울지역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전기통신공사가 1만 회선 용량을 구축하기는 했으나 무선호출기 초도 공급량은 250대. 즉 한정적 소수만 이용했다. 당시 무선호출기 가격은 15만 원, 가입비는 1천500원, 월 사용료는 1만 2천 원으로 책정됐다. 물가를 감안한다면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무선호출기 초도 물량이 제한됐기에 개통일인 15일 이전, 원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전화청약 접수를 받았다.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신청서와 일반전화가입증명서, 기기값과 가입비 등을 내야 했다. 공급 대비 수요가 높았기에 가입은 청약 순위로 결정됐다. 이 때문에 순위결정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했어야 했다. 관공서 등이 청약 1순위로 유리했다.


무선호출기는 7자리 숫자 번호가 부여됐다. 초기에는 미리 정해놓은 자신의 집이나 회사, 기관 등으로 호출대상이 고정화됐다. 장비 성능과 전파 특성상 전파 장애가 비교적 심한 지하도나 지하철 등에서는 신호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선호출기는 도입 전부터 급부상했다. 전화청약접수 마감일인 14일 전날만 해도 1천500여 대 신청 접수가 이뤄졌다. 경쟁률만 8대 1이다.6) 


삐삐인생 탄생


초기 무선호출기는 회선이 적고 기기도 많지 않아 대중화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관공서나 국회, 병원, IT기업과 유통 시장 등 서비스 기업들이 주로 애용했다. 


예를 들면, 특정 기업에서는 무선호출기를 장착한 CS팀을 꾸려 신속한 AS를 지원하는가 하면, 외무부는 사건사고 이후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국장급 이상 간부 대상 무선호출기를 허리에 차도록 제도화했다. 연예인 역시 무선호출기를 활용했다. 매니저가 삐삐를 호출해 연예인의 스케줄 소화를 도왔다. 


당시 이같은 사회적 현상을 ‘삐삐인생'이라 불렀다. 언제 어디서나 호출할 수 있다는 말은 24시간 대기가 가능하다는 것. 당시 30대의 설움이 담겨 있었다. 물론 단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의 능률이 오르고 보다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도 부각돼 대중적으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7) 


서울 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제한은, 바꿔 말하면 수신자가 서울에 있기만 하면 전국 어디서나 호출이 가능했다. 중계지점까지만 전달된다면 서울 시내 무선 기지국에서 수신자에게 호출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수신자가 지정된 곳에서만 호출을 받았기에 전국적으로 무선호출기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이후 서울이 아닌 부산 지역을 대상으로 무선호출기 도입이 확산됐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주식회사(현 SKT) 현판식 [사진=SKT]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설립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이동통신에 최적화된 임무 수행을 위해 1984년 3월 29일 자동차다이얼전화(카폰)와 무선호출기 업무를 전담할 자회사 ‘한국이동통신서비스’를 설립한다. 수권자본금 5억 원, 납입자본금 2억 5천만 원, 서울 성동구 구의동 소재 광장전신전화국 청사 내 사무실을 마련했다. 초대 사장으로는 유영린 전 전기통신공사 원주지사장이 선임됐다.8) 


직원수는 불과 32명 수준으로 작았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한국이통서비스는 차량에 기다란 안테나를 달아주는 곳 정도로, 혹자는 주요 인사들이 좌천돼 오는 곳이라 여길 정도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 업체였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모토로라에서 출시된 무선호출기 [사진=SKT]

1차 전환기 - 디스플레이 기반 무선호출기 등장


1986년 무선호출기 서비스 1차 전환점이 마련된다. 지정된 호출만 가능했으나 디스플레이가 장착되면서 발신자 누구나 원하는 내용을 수신자에게 보낼 수 있게 됐다. 즉, 수신자가 발신자를 알 수 있다.9)


같은 해 2월 1일 체신부와 한국전기통신공사는 문자가 표시되는 디스플레이 기반 무선호출기를 도입했다. 기기값은 20만 원, 월 사용료는 동일한 가입비 1천500원, 사용료 월 1만 2천 원, 회선을 추가하면 개당 8천 원을 내야 했다. 


신제품의 출현은 구제품의 가격인하를 유도했다. 디스플레이가 없는 전통적 무선호출기 서비스는 월 1만 2천 원에서 25% 인하한 9천 원, 회선 추가는 9천 원에서 33% 인하한 6천 원으로 하향 조정됐다. 


디스플레이 도입에 따라 무선호출기는 신호음 이외에도 호출자의 전화번호나 부호가 표시됐다. 그러다 보니 판매량이 급상승했다. 도입 후 2개월이 지난 3월 말에도 가입을 했으나 대기를 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같은 기간 청약접수는 약 5천여 대 수준, 이중 약 10%가량이 청약승낙을 받았으나 기기를 받지 못했다. 


그 사이 1987년 서울과 부산 지역에서 대전, 대구, 광주, 인천까지 무선호출기 서비스 지역이 확대됐다. 88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춘천과 제주도까지 뻗어 나갔다.


무선호출 10만 가입자 돌파 기념식 [사진=SKT]

2차 전환기 - 무선호출기 춘추전국시대


1988년 무선호출기 서비스는 2차 전환기를 맞이한다.


같은 해 5월 1일 체신부는 무선호출수신기 공급제도를 공급자 중심에서 이용자 중심으로 개편했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일괄구매해 보급하는 이전 방식과 달리 제조업체가 자체 공급망을 활용해 무선호출기를 판매하면서 이용자 선택권이 강화됐다. 바야흐로 무선호출기 춘추전국시대다.10)


무선호출기 내수시장 규모는 50억 원 수준으로 성장했다. 점유율 경쟁은 한층 더 치열했다. 무선호출기 제조사인 현대전자와 맥슨전자, 삼성반도체통신, 금성반도체, 한국모토롤라 등이 다양한 기기를 선보이는가 하면, 대대적인 가격 인하도 서슴지 않았다. 15~20만 원 수준의 무선호출기는 10~11만 원으로 내려갔다. 


또한, 이용자 중심 개편을 통해 가입비가 없어지고, 임대 사용이 도입되면서 비용 부담도 낮아졌다. 


이에 따라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연간수요는 4만 2천대 수준, 시장 신장률은 30% 이상을 기록했다. 1982년 도입된 무선호출기는 1988년 12월 28일 가입자 10만을 돌파했다. 명실상부 이동통신의 한 획을 긋는 트렌드로 부상했다. 1986년 가입자가 3만 8천에 불과했으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었다.11) 


다만, 문제는 무선호출기 국산화가 더뎠다는 것. 시장에서 외산업체의 강세가 지속됐다. 한국모토로라의 시장 점유율은 대략 65%를 기록할 정도로 높았다. 게다가 미국의 개방압력이 거세지면서 국산 무선호출기는 비상 상황에 놓였다. 


1990년 초. 체신부가 이동통신 사업 육성 계획을 발표하면서 관련 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동통신 사업분야의 민간업체 신규 참여를 개방하면서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관심이 쏠렸다. 3~4개 통신 관련업체 공동출자의 의한 1개 사업자만을 뽑는 규칙이었기에 재벌들의 계산기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12) 


무선호출기 시장 역시 급속도로 성장했다. 제조사 경쟁이 치열할수록 발전은 비약적으로 전개됐다. 무선호출기는 성능뿐만 아니라 휴대성도 높아졌다. 가격은 점차 내려갔다.


다만, 무선호출기 보급이 늘어날수록 사회적 문제도 덩달아 잦아졌다. ▲대학 부정 입학 ▲시험 부정행위 ▲노동강도 심화 ▲자율성 박탈 ▲범죄 악용 등 무선호출기를 활용한 여러 잘못된 행위들이 꼬리를 물고 발생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무선호출기를 허리에 차고 다니면 전자파 때문에 딸만 낳게 된다는 악성 루머까지 퍼질 지경이었다.


수도권에서 경합을 벌인 한국이동통신 012(좌)와 나래이동통신 015 광고 포스터 [사진=SKT, 나래이동통신]

3차 전환기 - 012 vs 015


1991년 4월 체신부는 무선호출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가입자 수용량을 늘려야 했다. 


이에 따라 별도 식별번호를 부여한 무선호출전용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012’ 번호만 돌리면 곧바로 무선호출전용교환망에 연결돼 호출이 가능했다. 시외 가입자의 경우 해당지역의 지역번호를 눌러야 했으나, 이제부터는 지역에 관계없이 012로 통일됐다. 한국이동통신보다 더 유명한 상징적 숫자, ‘012’이 부상한 순간이다.13)


체신부와 한국이동통신은 1992년 7월 언제 어디서나 일반전화를 통해 음성메시지를 녹음해 저장하고 이를 무선호출 가입자가 직접 들을 수 있는 ‘음성사서함 서비스’ 시범 가동에 돌입했다.14)


무선호출 시장의 3차 전환점은 1993년 발생했다. 사실상 한국이동통신이 독식하고 있는 무선호출기 시장에 제2무선호출사업자가 등장하게 된 것.


같은 해 5월 가장 빨리 호출 신호를 쏴 올린 제주이동통신을 시작으로 충남과 대전지역을 대표하는 충남이동통신, 수도권을 아우를 나래이동통신과 서울이동통신, 부산과 경남을 책임지는 부일이동통신, 충북의 우주이동통신, 전북이동통신, 대구와 경북은 세림이동통신이 각각 서비스 상용화에 돌입했다. 


이로써 10개 사업자가 무선호출 시장을 두고 경합에 나서게 됐다. ‘012’를 보유한 한국이동통신과 ‘015’ 식별번호를 부여받은 9개의 제2무선호출사업자 구도가 형성됐다.15)


특히 가장 치열한 경합을 벌인 곳은 수도권이다. 한국이동통신과 함께 나래이동통신과 서울이동통신이 양보 없는 싸움을 이어갔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은 22개 기지국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나래와 서울의 경우 50개 기지국을 통해 음영지역을 최소화했다. 이에 따라 1992년 200만을 돌파한 무선호출기 가입자는 1993년 8월 300만 돌파라는 기염을 토했다.


15년 만에 정점…너무 빠른 퇴장


제2무선호출사업자가 등장함에 따라 서비스 경쟁도 치열했다. 무선호출과 컴퓨터 통신을 결합한 서비스, 음성 지원, 팩시밀리 자료 전달, 컴퓨터 문서를 저장해 수신할 수 있는 사서함 서비스, 증권정보와 생체리듬, 운세뿐만 아니라 일기예보까지 전송하는 등 각 사업자들은 차별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또한 제2사업자들은 대부분 주문자부착생산방식(OEM)으로 국산 무선호출기를 대량 구입해 보급했다. 기고만장했던 모토로라의 가격 인하를 부추길 정도였다. 사용료와 단말가격의 인하는 곧 수요 증가라는 선순환을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사업자간 경쟁은 더 가속화됐다. 급격한 성장은 말할 필요가 없다.16) 


특히 1997년 5월 1일 동원산업은 해피텔레콤을 통해 수도권 제3무선호출사업자로 자리매김했다. 가뜩이나 첨예했던 수도권 경쟁이 더 극심해졌다.17) 가입자 1천500만 명이라는 대업을 이룬 시기도 이때다.


급속한 성장은 진통이 따른다. 불법개통도 판쳤다. 부모 몰래 자녀가 주민등록등본과 도장만 가져가도 무선호출기를 개통해주기도 했다. 각종 할부상품을 내걸고 고객을 유혹에 나섰다. 


또한 10대 청소년 사이에서 무선호출기가 일대 붐을 이루면서 사회적 지탄이 쏟아지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학업방해를 이유로 학생들의 삐삐를 압수하거나 더러는 체벌도 이뤄졌다. 게다가 법원에서는 삐삐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지 과태료 100만 원의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물론 무선호출기는 당대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었다. 제한된 숫자는 은유적 표현을 나타내기에 적합했다. 최근까지도 숫자 조합을 통한 의미 전달 방식은 ‘삐삐 감성’에서 출발한다. ‘486(사랑해), 0179(영원한 친구), 1004(천사), 17175(일찍 일찍 와), 8282(빨리빨리), 827(파이팅)’ 등 꽤 많은 조합을 현재도 찾아볼 수 있다.


15년간 최정점에 이른 무선호출기는 단짝으로 불린 발신전용휴대폰인 시티폰의 몰락과 1세대(1G)에서 2세대(2G)로 넘어오며 대중화를 이룬 휴대전화에 밀려 급속하게 감소했다. 1997년 1천500만 가입자를 보유한 무선호출기 가입자는 1999년 무려 300만 명으로 확 줄었다.18) 


2000년에 이르러 견디지 못한 사업자들은 폐업하거나 피인수됐으며, 그나마 명맥을 잇던 012는 리얼텔레콤이 2009년 폐업을 알리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 <82년부터 전신 전화 사업 공사화>, 동아일보, 1980.12.26.

2) <의보법 개정등 11개 법안 의결>, 조선일보, 1981. 3.21.

3) <전기통신공사 설립 2조5천억원 출자>, 매일경제, 1981. 2.18.

4) <한국전기통신공사 오늘 오후부터 업무>, 동아일보, 1982. 1. 4.

5) <무선호출 서비스 15일부터>, 동아일보, 1982. 12. 9.

6) <무선호출 서비스제 이용급증...청약적체>, 매일경제, 1983. 1. 18.

7) <삐삐인생이 늘고 있다>, 조선일보, 1984. 8.24.

8) <밝아오는 이동통신의 여명> [MOBILE STORY SINCE 1984], p40~41, SK텔레콤, 2004.12.16.

9) <문자표시 무선호출기 공급>, 매일경제, 1986. 1.28.

10) <삐삐이용료 평균 41.9% 내려 수신기 구입도 가입자 자유선택>, 매일경제, 1988. 4. 9.

11) <'012' 무선호출 서비스> [MOBILE STORY SINCE 1984], p58, SK텔레콤, 2004.12.16.

12) <재벌 제2이동통신 눈독>, 동아일보, 1991. 8. 3.

13) <'012' 무선호출 서비스> [MOBILE STORY SINCE 1984], p59, SK텔레콤, 2004.12.16.

14) 이공순 기자, <연인끼리 소곤소곤 전화사서함 유행>, 한겨례, 1992. 9. 1.

15) 김학진 기자, <무선호출 본격경쟁 돌입>, 동아일보, 1993. 9.15.

16) <전환기 맞은 무선호출 서비스>,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17) <국내 최초 고속삐삐 개시>, 매일경제, 1997. 5. 1.

18) 함석진 기자, <삐삐 사업자들 "우리 살길 찾아주오">, 한겨례, 199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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