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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05. 2023

(2)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쌍안테나를 세우다

2부. 자동차다이얼전화 '카폰'

우리가 흔히 쓰는 ‘카폰’이라는 용어는 본래 '자동차다이얼전화'라 불렀다. 1984년 수도권을 대상으로 일반인 대상 상용화 이전은 극소수에게만 특수한 상태로 보급됐던 희귀 통신수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카폰이 최초 쓰였던 때는 언제일까. 시차가 있을 수 있으나 1960년대 ‘자동차다이얼전화’라는 명칭으로 개통이 이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시세로 단말기 가격은 무려 85만원. 기본 사용료는 월 1만750원, 도수료 통화당 63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비용 부담을 초래했다. 프리미엄만 대당 1천만원 수준으로 알려질 정도로 비싼 서비스였다. 


비싸다 보니 범죄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미군용으로 보급된 모토로라 카폰 14대를 훔쳐 달아나는 절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 14대 카폰의 당시 가격은 총 7천490달러로 한화 약 1천만원에 달했다. 


극소수 프리미엄 ‘카폰’…사회적 충돌 야기


자동차다이얼전화는 비싼 가격과 까다로운 조건으로 극소수만 허가를 받아 이용했다. 1975년 기준 약 200대 가량이 보급됐다. 200대가 현재는 적을 수 있지만, 그 때는 적체 현상을 불러올 정도로 많은 수 였다. 기술방식에 따른 한계로, 아날로그 통신방식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신부(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전화공급확대를 위한 투자재원조달에 나서 전화공채를 발행하기도 했다.2) 


희귀한 물건은 원치 않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카폰은 프리미엄 이미지로 인해 과시용으로 전락했다. 카폰의 본래 목적은 '공중통신서비스 향상과 긴급한 업무연락을 위해서'라는 공공적인 면이 있었으나, 그 의미가 퇴색했다. 정부 기관을 비롯한 공공단체 승용차에 가설허가를 내줬지만, 일정한 기준이 없어 논란을 부추겠다. 결과적으로 개인 승용차까지 가설이 가능해 특권의식을 조장했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하루에 한 통화도 하지 않은 일반 고객도 과시를 목적으로 카폰을 개설했다. 카폰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부유함을 상징해서다. 물론 이 같은 특권의식은 일반 국민에게 위화감으로 작용했다.3)


희귀하고도 비싼 카폰은 사실 불편했다. 교환양에 의한 수동식 송/수신만 가능했다. 이동 시에는 터지지도 않았다. 단선 방식으로 일반전화보다 감도도 낮다. 달리는 차 안에서의 카폰 통화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체신부에 따르면 1980년 11월 20일 카폰 적체로 인해 신규접수가 중단됐다. 정부기관차에 38대, 기타 단체 166대, 개인 승용차 102대로 총 306대가 가설돼 운용됐으나, 그 마저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활용도는 당연히 높지는 않았다. 1981년 4월 22일 기준 서울 남산중계탑으로부터 5회선으로 운용된 차량용다이얼전화는 대당 평균 통화량이 월 20여회, 일부 가입자의 경우 월간 10여통화도 하지 않는가 하면 아예 사용이 없는 고객도 빈번했다. 


이 같은 사회적 현상으로 인해 공중통신서비스 향상과 긴급한 업무연락을 위해서라는 초기 목적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제한된 회선 때문에 정작 필요한 기관이나 단체가 사용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활용 사례가 있다. 바로 대학 입시다. 정원에 따른 미달과 초과분에 대해 기민하게 대응했어야 했기에 실시간 정보 전달이 가능한 카폰은 유용한 도구였다. 이후에도 카폰은 대학입시 때마다 첩보작전을 수행하듯 요긴하게 사용됐다.4)


'카폰' 대중화를 위한 한걸음


극소수에 한정된 카폰은 정보통신발전에 따라 일반 국민에게로 한발 더 다가섰다.  1980년 10월 통신을 국가산업정책의 핵심사업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체신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경영체제개선위원회'가 구성됐다. 통신사업의 기본 골격을 재편하기 위함이었고, 정보통신이 신성장 산업으로 전면 배치됐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정부는 1981년 3월 14일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을 제정해 공포하고, 같은 해 5월 12일 전기통신법을 개정했다. 이 법안을 기반으로 정보통신을 전담하는 공기업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출범했다. 


정부 정책 추진과 공기업 설립을 통해 카폰의 서비스 도입을 보다 구체화됐다. 앞서 우리나라는 이동전화를 실현화하기 위해 1979년 미국서 개발된 셀룰로 방식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미국 모토로라와 AT&T, 스웨덴 에릭슨, 일본 NEC 등 장비업체들이 국내 문을 두드렸다. 결과적으로 1982년 10월 '이동무선전화 현대화 계획'이 수립되면서 전 세계 4번째로 AMPS(Advanced Mobile Phone Service)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83년 11월 체신부는 '자동차다이얼 전화보급 세부계획'을 마련해 발표했다. 발표 당시만 해도 1984년 1월부터 1차로 수도권 지역에 3천대의 자동차 다이얼전화를 가입 신청받아 보급하고 2차로 같은해말 다시 5천대를 보급해 총 8천대로 늘리겠다는 의도였다. 


이 같은 목적 달성을 위해 도심지 고층빌딩전화국 등 10여개 건물 옥상에 고성능 안테나를 배치했다. 그간의 적체 현상을 딛고 도심 지역의 빌딩 숲으로 인한 전파 방해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총 38억원이 투입됐다. 교환시설은 3천가입자 용량으로 구성됐다. 


정부는 같은해 12월 전기통신법을 폐지하고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을 각각 제정해 현실에 밑바탕을 둔 제도 정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출범


카폰의 대중화는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출범을 빼놓을 수 없다. 실제 서비스를 추진하는 컨트롤타워이자 사업자였기 때문. 


체신부의 세부계획을 직접 추진해야 하는 한국전기통신공사는 무선호출과 함께 차량전화를 전담할 수 있는 전담회사 필요성을 인식하고 1984년 2월 10일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 전담회사 설립계획안'을 작성했다. 이로써 3월 29일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설립됐다. 


신설 회사는 수권자본금 5억원, 납입자본금 2억5천만원. 이우재 한국통신공사 사장을 발기인으로 8명 전원 공사 관계자들로 구성했다. 직원수는 32명. 최초 ‘한국차량전화서비스주식회사’로 회사명을 정했으나 이후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T)’로 최종 낙점했다. 초대 사장으로는 유영린 전 전기통신공사 원주지사장이 선임됐다.


그 인기와는 사뭇 다르게 초기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청사도 없어 모회사인 한국전기통신공사에 의지했다. 서울 성동구 구의동 광장전신전화국 2층 40평 남짓 공간에 사무실이 최초로 문을 열었다. 


카폰 청약접수 시작

[사진=SKT]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설립에 앞서 카폰의 청약 접수는 4월 2일 한국전기통신공사로부터 시작됐다.5) 카폰의 청약 및 승낙절차를 일반가입자전화청약과 승낙순위에 따르기로 했다. 1차 보급량은 계획대로 3천대가 풀렸다. 


다만, 기존 구형 카폰을 사용하던 고객 348대분을 우선적으로 교체해 줬기 때문에 실제 청약대상 회선수는 2천652대였다. 


카폰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단말기를 구입해야 한다. 당시 단말기 가격은 어마했다. 4개의 제조사가 경합을 벌이고 있었는데, 모두 해외 유수기업의 기술 라이선스를 받아 제작했다.6) 일본 NEC 기술을 도입한 금성전기(현 LG전자), 미국 EF존슨 측의 동양정밀, 미국 모토로라는 대영전자와, 캐나다 모바텔은 현대전자와 손을 잡았다. 각각의 단말기 가격은 330만원, 300만원, 340만원, 330만원 수준이었다. 


단말기를 구매했다면 허가를 받아 가입신청을 해야 한다. 초기 카폰의 서비스는 수도권에서만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서울과 안양, 수원, 성남시에 등록된 차량을 갖고 있는 거주자를 대상으로 신청받았다.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위치한 중앙무선전신국을 찾아가 청약서와 무선국허가개설서 등 소정의 서류와 함께 설치비와 채권매입액을 내야 했다. 


설비비는 88만5천원, 채권은 20만원 수준이며, 기본료는 월 2만7천원이다. 도수료는 8초당 20원이며 시회통화 요금을 따로 책정됐다. 카폰 고객이 되려면 당시 시세로 최소 400만원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유지비 또한 감당이 돼야 했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무선전화를 전담할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출범하면서 5월 1일 관련 사업을 이관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7일부터 카폰의 정식 개통이 이뤄졌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광장전화국 근처 중앙무선전신국 마당 한켠에 차량전화 설치를 위한 현장사무실을 마련했다. 천막을 둘러친 임시 건물이었기 때문에 낡고 초라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뜨거웠다. 하루 20~30대씩 판매된 카폰은 3개월 만에 초도물량에 대한 청약이 마감됐다. 심지어 내년 공급분에 대한 청약 접수를 받기에 이르렀다. 직원들은 야근을 밥먹듯이 해야만 했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사후서비스(AS)까지 책임졌기 때문에 가입자는 보다 늘어났다. 하루에 쏟아지는 청약문의가 무려 30~40건에 달할 정도였다. 


당대 카폰의 인기비결은 셀룰러 방식이 도입돼 기존 대비 뛰어난 커버리지를 갖췄기 때문이다. 회선증설에 따른 기다림 없는 통화연결, 보다 자연스러워진 통화품질도 한 몫했다. 이전 대비 충분한 활용성을 보임에 따라 누구나 카폰 하나 장만하는 게 꿈처럼 여겨졌다. 


3년 7개월 만에 가입자 1만명 돌파

일반인도 가입할 수 있는 카폰 시대가 열리자 대중은 열광했다. 400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청약접수가 밀릴 정도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 결과 1984년말 계획한 초도물량 3천대가 모두 소진됐다. 


1985년 2월 제주도 전역에 150대의 카폰이 도입됐다. 카폰 단말 제조업체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가격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금성전자와 대영전기산업, 현대전자산업, 동양정밀공업 등 4개 사업자 시장에 강자인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이 참여하면서 단말 경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됐다. 


초기 초라한 때와는 달리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안정적으로 안착하면서 서비스 가입에도 속도가 붙었다. 규모의 성장이 가능해지면서 가격 접근성도 높아졌다. 설비비는 88만5천원에서 65만원으로 인하되고 유지보수료도 폐지됐다. 이후에도 요금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카폰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체신부는 카폰 전국망을 목표로 1986년 부산을 시작으로, 1987년 대전, 대구, 광주 개통을 주문했다. 


마침내, 1987년 12월 5일 서비스 시작 3년 7개월 만에 가입자 1만명을 돌파했다. 


또한 1989년 체신부는 이동체통신 전국망 구축사업을 수립하고 그에 따른 1차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는 이듬해 1990년 4월 최종 마무리됐다. 19개시를 지원했던 카폰 커버리지는 전국 55개시로 확대됐다.


쌍안테나의 위엄…단속도 피했다


카폰이 대중화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과시용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청약접수가 몰리는 등 수요는 많았으나 활용도가 떨어졌다. 카폰의 편의성을 체감하기 위해 가입한 고객들이 있었기는 하나 실제 조사는 그렇지 않았다. 


1985년 체신부 보고서에 따르면 1984년말 개통된 카폰 수는 2천659대 -총 3천대가 풀리긴 했으나 셀룰러가 아닌 이전 시대 사용자 교체가 있었다- 다. 국가기관 221대. 언론기관 44대. 국영기업 44대, 교육기관 32대. 개인 32% 분포를 보였다. 


하루 평균 1대당 통화량은 2분 수준. 1개월간 10 통화 미만 카폰은 80여대, 지난해 11월 한 통화도 쓰지 않은 카폰도 집계됐다. 400만원이 넘는 초기 비용과 유지비를 감안한다면 사용량이 너무도 저조했다.7) 


대중화 바람에도 카폰은 여전히 비싸고 희귀했기에 신분의 부유함을 의미했고, 과시욕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가시적으로 이를 드러내 준 것이 바로 '안테나'다. 카폰은 전파를 송수신하기 위해 차량에 안테나를 설치해야 했다. 안테나를 길게 늘어뜨린 차량이 있다면 그 차는 곧 카폰을 설치한 차량이고, 그 자체가 차주의 지위를 결정했다. 


엉뚱하게도 안테나를 길게 늘어뜨린 차량이 경찰 단속을 피한 사례가 종종 목격됐다. 카폰을 장착한 차량은 차주는 곧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의미했고, 많지는 않았으나 사소한 교통법규 정도는 재량에 의해 피할 수 있는 시대였다. 안테나만 달면 단속 회피 가능성이 올라간 셈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차량을 구매하면서 안테나만을 설치하는 차량이 늘었다. 카폰은 차량 내부에 포설한다. 외부에 안테나만 장착하더라도 마치 카폰을 장착한 것처럼 위장할 수 있다. 높은 비용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프리미엄 카폰 서비스는 약 5천원에서 2만원 가량의 안테나 설치비만 있다면 연출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당시 경찰에겐 또 하나의 골칫거리가 있었다. 바로 ‘쌍안테나’였다. 대부분 하나의 안테나가 설치됐으나 특정 제조업체가 내놓은 쌍안테나는 후발주자였던 제조사를 단숨에 점유율 2위에 올려놓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문제는 이 쌍안테나가 주요 인사들의 경비차량과 헷갈렸기 때문. 경찰이 쌍안테나 설치를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체신부는 형식승인이 난 상황에 위법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8)


카폰은 고객의 차량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소형차가 인기를 끌었던 당시 카폰 대중화로 중형차의 인기가 서서히 올라갔다. 예컨대 포니와 맵시의 판매량은 줄었으나 스텔라와 로열엑스큐 등의 중형차 판매율이 증가했다. 차종에 따라 차주가 대접받는 풍토가 있었고, 카폰을 설치하거나 안테나만 달더라도 그에 걸맞은 차량이 받쳐줘야 했다. 


1G 역사와 함께 카폰도 사라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카폰의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우리나라가 이동전화를 상용화한 때다. 카폰 역시 1세대 통신(1G)에 속하기는 하지만 이 때부터 1G 시작을 말하기도 한다. 7월 1일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은 AMPS(Advanced Mobile Phone System) 방식 1세대 이동전화 서비스를 도입하고 청약 접수를 받았다. 한국이동통신은 모토로라가 개발한 다이나텍 8000 시리즈를 국내 들여오기도 했으며, 이듬해 삼성전자가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 SH-100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던 시점이다.


1세대 도입은 기존과는 다른 자유로운 이동통신이 가능했다. 번호만 호출할 수 있는 무선호출기(삐삐), 차량 내부에 장착해야만 하는 자동차다이얼전화(카폰)와는 활용도 자체가 컸다. - 아날로그 통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광의의 의미로 카폰 역시 1G에 속할 수 있다 -


결과적으로 1세대 이동전화 휴대폰은 카폰을 빠르게 대체했다. 제조사들을 중심으로 카폰의 휴대폰 전환 프로모션 마케팅 등이 활성화되면서 1991년 1G 휴대폰이 카폰 가입자를 앞질렀다. 그 격차는 1992년 무려 2배 이상으로 벌어졌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에 따르면 1992년말 기준 카폰 가입자는 9만명으로 집계됐으나 휴대폰 가입자는 무려 19만명 수준이었다. 


카폰 제조사는 5강 체제에서 3강 체제로 재편됐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전자의 급속한 성장, 혁신을 거듭하던 현대전자가 치열한 경쟁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1989년 카폰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35.3%로 뒤집기에 성공해 1위에 올랐다. 현대전자는 35.1%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두 제조사의 점유율은 무려 70.4%. 그 사이를 한국모토로라가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다. 1989년말 한국모토로라의 점유율은 30%로 늘어났다.


다만, 제조사들의 카폰 경합도 1G 휴대폰으로 옮겨 가면서 시들해졌다. 더욱이 1996년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 2세대 통신(2G)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아날로그 통신 시대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도 그럴 것이 주파수 이용효율이 떨어지고 통화 품질이 열악해 결과적으로 주파수 낭비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국회에서 촉발된 아날로그 통신 휴대폰 감청여부 논란이 부상하면서 카폰 역시 그 영향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정보통신부는 1999년 12월 21일 전환대책을 조건으로 아날로그 서비스 중단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같은해 12월 31일 아날로그 이동전화(1G)가 종료되면서 그에 속한 카폰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직전인 12월 30일 아날로그 이동전화 가입자는 2천여명 수준이었다.



1) <은행장차등에 팔아>, 경향신문, 1969. 5.12.

2) <내년에 전화공채 20억원 발행>, 매일경제, 1975. 3.17.

3) <허세용으로 전락한 카폰>, 경향신문, 1981. 4.22.

4) <막판 인파...심야 "눈치전쟁">, 조선일보, 1982. 1.14.

5) <카폰 4월 등장 2일부터 접수>, 매일경제, 1984. 3.26.

6) <카폰 차내전화 새 성장 업종으로 부상>, 매일경제, 1984. 8.18.

7) <카폰 과시용인가>, 경향신문, 1985. 1.19.

8) 박수만 기자, <쌍안테나 카폰>, 경향신문, 1985.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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