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237. 망 주권 잔혹사,
넷플릭스 판도라 상자 열다

59부. 코로나19, 멈춰선 일상

by 김문기

"협상은 끝났다. 이제는 법정에서 보자."


2020년 4월 8일, 넷플릭스가 SK브로드밴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기업 간의 다툼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전 세계 망 이용료 전쟁의 최전선이자 '글로벌 테스트베드'로 강제 소환되는 선전포고였다. 그날 넷플릭스가 던진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이라는 폭탄은 방송통신위원회의 중재 절차를 단숨에 마비시켰고, 우리 통신 주권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균열을 냈다.


이 전쟁의 진짜 서막은 8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9년 8월 22일, 서울행정법원 제7부 법정 안의 공기는 질식할 듯 무거웠다. 방통위가 페이스북의 '접속 경로 임의 변경'에 대해 부과한 과징금 처분이 부당하다며 페이스북이 낸 소송의 1심 판결이 나오는 날이었다.


결과는 페이스북의 '완승'이었다. 법원은 페이스북의 경로 변경이 이용자의 이익을 현저히 해쳤다고 보기 어렵다며 방통위의 처분을 취소했다. 당시 판결문을 받아 든 기자들의 얼굴은 일제히 굳어졌다. 글로벌 공룡들에게 '한국의 규제 당국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강력한 학습 효과를 심어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넷플릭스라는 더 큰 괴물을 깨우는 '나쁜 선례'가 됐고, 매년 수백억 원의 망 이용료를 내는 국내 사업자와 무임승차하는 해외 사업자 사이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욱 가파르게 기울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망(網)과 넷플릭스의 오만


당시 SK브로드밴드의 상황은 비참했다. 2019년 말부터 넷플릭스 트래픽은 <킹덤> 같은 오리지널 대작들이 터질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했다.


2018년 5월 대비 2020년 3월의 트래픽은 무려 15배나 뛰었다. 해외망 용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고객들은 영상 끊김 현상에 항의하며 고객센터에 불을 질렀다. 통신사는 망 증설을 위해 수백억 원을 쏟아붓는데, 넷플릭스는 그 고속도로 위를 과속하며 도로를 망가뜨리면서도 통행료를 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SK브로드밴드는 무려 9차례나 협상을 요구하며 읍소했다. 인프라 비용을 최소한이라도 분담해달라는 상식적인 요구였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답변은 오만했다. "우리는 좋은 콘텐츠를 제공해 가입자를 유지시켜주니 오히려 통신사가 고마워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전형적인 '무임승차'를 넘어선 '적반하장'이었다. 넷플릭스는 '망 중립성'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방패로 교묘하게 사용하며 협상을 고의적으로 공전시켰다.


중재를 걷어찬 기습


참다못한 SK브로드밴드가 2019년 11월 12일, 마지막 평화적 해결책으로 방통위에 '재정(중재)'을 신청했다. 정부가 나서서 적정한 대가를 산정해달라는 호소였다. 방통위도 고심 끝에 2020년 5월경 중재안을 내놓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넷플릭스가 전 세계 통신 역사에 남을 '뒤통수'를 쳤다.


방통위의 중재 결과가 나오기도 전인 4월 8일, 넷플릭스는 사법부로 달려가 "돈을 낼 의무가 없음을 확인해달라"며 기습 소송을 감행했다. 행정부의 중재 기능을 대놓고 무력화시키고 '법대로 하자'며 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이 소식을 타전하던 날, 통신 업계와 관가는 경악했다. 대한민국의 갈등 조정 시스템을 통째로 무시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소송을 통해 방통위의 절차를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때부터 지루하고 치열한 1,200일간의 법정 전쟁이 시작됐다.


넷플릭스의 이 기습은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오렌지, 미국의 AT&T 등 글로벌 ISP들이 한국의 소송을 숨죽여 지켜봤다. 한국 법원이 넷플릭스의 손을 들어준다면 전 세계 통신망은 거대 CP들의 '공짜 고속도로'로 전락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국이 승리한다면 전 세계 망 이용료 징수의 표준(Standard)이 세워지는 셈이었다.




부록 : 망 주권 전쟁의 서막


2017년 하반기: SK브로드밴드, 넷플릭스에 망 이용대가 관련 첫 협상 요청.

2018년 ~ 2019년 상반기: 9차례 협상 진행, 넷플릭스의 '무상 전송' 고수로 합의 실패.

2019년 8월 22일: 페이스북, 방통위 상대 행정소송 1심 승소. 글로벌 CP들의 기세 확장.

2019년 11월 12일: SK브로드밴드, 방통위에 망 이용대가 협상 중재(재정) 신청.

2020년 4월 8일: 넷플릭스, SK브로드밴드 대상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 제기.



keyword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김문기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IT 전문지에서만 10년 넘게 근무하며 전세계를 누볐습니다. 이전에 정리했던 이동통신 연대기를 재수정 중입니다. 가끔 다른 내용도 전합니다.

14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7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3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236. 코로나19 암흑기 도래 사상 초유 비대면 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