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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책 READING GOING Dec 18. 2021

세기 말

2020년을 살아가고 있다. 


20이란 숫자가 반복되는 2020년.

기분좋은 설레임으로 시작한 2020년. 


상황은 감당하기 버거운 일들이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희망이란 단어를 붙잡았다. 


그러나 2월이 지나면서

코로나 19라는 낯선 이름이 

삶의 구석구석에 절망이란 그물로 가득찬 것 같았다.  


코로나가 최절정이었던 삼월.

노란 산수유가 조금씩 피어나던 날,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생각보다 더 많이 허전했고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코로나로 집에만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아버지 삶의 흔적을 정리하다보니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이 되었다.    

  

낯선 봄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여름은 깊어가던 어느 날, 

나는,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되었다. 


휴가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쩔수 없이 반복되는 어려움 속의 두려움과 불안은 

20년 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시간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대하는 집단 우울을 떠올리게 되었다.  

    

세기말이자 하나의 밀레니엄을 마감하는 1999년. 

동서양의 지각변동과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언이 속출했지만, 

그 중에서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의 해'와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대조된 이야기와 함께 999년의 세기말은 증후군이 되어 

여러 가지 불안감을 가중시켰었다.     


그리고, 당시의 언론은 세기말을 다양한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프랑스 파리는 에펠탑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불빛들과 함께 

2000년 첫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에펠탑 2천년 카운트다운 전광판을 

점등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세기말에 대한 불안과 흥분, 종말의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하는 시점이었던 1999년.

나는 영원을 살 것처럼, 스위스로 떠났다. 


한국 땅만 떠나면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배움은 좋았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감정은 새로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스위스에서 가깝고 나름대로 경비도 적은 프랑스로 유럽의 비자를 

연장하는 여행을 떠났다. 

가난한 학생의 신분으로 여행 자체는 사치였다. 

프랑스... 나라 이름도 너무나 아름다운 패션의 나라 프랑스. 

고급 호텔이 아닌 값싼 한인 민박에 머무는 현실을 인정했다.  

     

옛날 만화를 보면서 동경했던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갔고, 

너무나 가고 싶던 루브르 박물관과 

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제리제 거리를 걸었고, 

가는 곳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에펠탑은 내가 프랑스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그런데 마음과 생각은 너무 힘들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할 재정도 거의 바닥이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용기도 없었다. 

여행을 마무리할 즈음, 

민박집에서 선물로 받은 ‘바토뮤슈’라는 유람선 티켓을 사용해야 했다. 


멋진 파리 야경을 느끼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세느강을 유람선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요란한 불꽃 놀이와 화려한 조명 속에 빛나는 도시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함께 간 친구들은 너무 좋다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내게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이 좋은 것이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낮에 본 에펠탑과는 달리

밤에 바라본 에펠탑은 더욱 화려했다. 


관광객이라하기에 너무 무표정한 얼굴로 낯선 도시를 떠다녔다. 

어느 지점이 다가갈수록 에펠탑이 가깝게 다가왔다. 

마치 유럽의 군인들이 행진하는 것처럼 

발을 맞추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에펠탑에 너무나 큰 글자로 무언가 적혀있었다.  

    

100     

숫자 100.


오래 전 에펠탑 2000년을 카운트한다던 그 숫자.


99도 아니고

98도 아니고

101도 아니고

딱 떨어지는 숫자 100.     


에펠탑은 내게 이야기를 건냈다.   

   

너는 

정확한 때에 

정확한 장소에

정확한 곳에 와 있다. 

멈추지 말고 

계속 그 길을 걸어가라. 

결코 중단하지 말고

그 길을 걸어가라.     


그 시간 이후 유람선에서 어떻게 내려서 숙소로 돌아왔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한국으로 다시 들어와서 새로운 일상으로 복귀하였다. 


에펠탑의 숫자 100은 

2020년을 살아가는 지금도 또렷한 사진이 되어 각인되어 있다. 


지금은 친구가 여행기념품으로 준 에펠탑 열쇠고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주 작은 에펠탑은 오래 전처럼 이야기를 건낸다. 


난 여전하다. 


난 네가 바라보는 열쇠고리처럼

난 축소되어 있지 않다. 


넌 여전히 

넌 그 길을 

걷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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