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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Sep 12. 2021

교사의 초심 : 잃어버리면, 다시 찾으면 돼요.

 언제든 다시 손 뻗어 찾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3년 차, 초심을 말하기엔 조금은 건방지다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초심을 다지고 다져야 했다. 나의 초심은 금세 흐려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첫 해에는 그토록 바라던 자리에 왔다는 성취감에 젖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고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 아이들 때문에 마음에 멍이 들어도, 조금 불합리한 것들이 고개를 갸웃하게 해도, 때론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응당 수용해야 할 몫이라 생각했다.


  2년 차 하고 반쯤 다다랐을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불평이 입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교사이기 이전에 공무원 사회이다 보니 불필요한 절차와 형식, 매뉴얼 밖으로는 발을 내딛지 않으려는 폐쇄성, 변화보다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모습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내가 학생일 때의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선과 지금의 아이들이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도 달랐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아직 순수하고 예쁜 편이었음에도, 사뭇 달라진 학교 현장 분위기는 초보 교사를 답답하고 막막하게 할 때가 많았다.


  불평은 점차 다채로워졌다. 극심한 시기에는 학교의 모든 것, 나아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비판적으로 생각되곤 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내게는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였다. 가족에게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학교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답답한 곳인지를 토로하는 날이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었다. 문득 내가 이토록 비판적인 사람이었던가, 깨닫게 되기 전까지 계속 계속.


  지금은 나를 웃게 하는 아이들도 당시에는 예뻐 보이기는커녕 스트레스만 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최대한 부딪히고 싶지도 않았고, 어쩌다 실랑이를 벌이게 되면 에너지를 다 앗아가 두통에 시달리게 하는 존재였다. 아이들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아닌, 그저 직업 중 하나로서의 '교사'를 생각하게 되며 최소한의 것만 하고 싶은 나날이 늘어났다. 수업에도 정성을 덜 쏟게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 가끔 아이들이 말을 잘 듣거나 수업 참여도가 좋은 날이면 칭찬 대신 안도감과 함께 스트레스를 '덜' 받곤 했다.


  비판인지 불평인지 경계가 모호한 생각들을 품고 있으려니 피로도는 높아지고, 삶의 만족도는 낮아졌다. 그토록 바라던 내가 되었다는 자랑스러움은 시들고, 내가 바라던 것도 결국 별 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자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들이 스스로의 가치마저도 깎아내렸던 것 같다. 임용생일 때는 지독하게 느껴지던 고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잘 이겨내던 나였는데, 첫 해에 초과근무를 달지 않고도 7시, 8시까지 남아 동료 선생님들과 남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캄캄할 때 학교 밖을 나서도 그저 즐겁고 감사한 나였는데, 복도만 걸어도, 교직원 화장실만 사용해도 가슴 뿌듯해지던 나였는데, 문득 바라보다 발견한 내 모습은 회색빛이었다. 교단에 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내가 몸 담은 이곳을 이리 싫어하게 되었는가 싶 떫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를 멀찍이서 바라보게 된 그즈음, 2019년 2월 8일에 타지에서 본가에 있는 가족에게 목놓아 울며 최종 합격 소식을 알리던 통화 녹음 파일을 듣게 되었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쁜 순간이라며 엄마가 녹음해두신 거였다. 2019년 2월 8일의 나와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은 함께 나눈 울음과 웃음이 범벅이 되도록 있는 힘껏 기뻐하고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때 나누었던 카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따뜻한 말들로 나를 쓰다듬어주며 내게 펼쳐질 앞날을 축복하고 있었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너는 '훌륭한 선생님, 좋은 교사'가 될 거라고.

 

  나 또한 그랬다. 그날 가족뿐만 아니라 나를 응원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그토록 꿈에 그렸던 '좋은 교사'가 되겠노라고 힘주어 생각했었다. 임용을 준비하면서 힘에 부칠 때면 그려보았던 학급 운영 이벤트, 나의 첫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 막연하고 거칠게 그려본 국어 수업, 이 시는 어떻게 가르쳐 줄까, 이렇게 가르쳐주면 좋겠다, 했던 생각들을 다시 새기며 좋은 교사가 되리라고, 내가 꿈꿔왔던 것을 펼치는 교사가 되겠노라고, 소중한 사람들이 건넨 기대에 부응하겠노라고, 나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교사가 되겠노라고, 꺼이꺼이 울던 그날에, 신규 교사 연수를 듣던 그날들에 생각했었다. 첫 해에 머리를 싸매며 제출했던 진도 계획, 수행 평가 계획을 부산에 집 구해주러 오신 엄마, 아빠에게 보여드리며 내가 생각해도 잘 짠 것 같다고 으쓱해하며 기대에 차 있던 나는 흐릿해지고 있었다.


  통화 녹음 파일을 들으며, 그날 10시에 받았던 최종 합격 문자와 날 축하해 준 사람들과 나눈 메시지를 쭉 보았다. 녹음 파일과 함께 그때의 감정이 재생되며 눈물이 고였다. 복합적인 감정과 함께 고인 눈물인지라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정확히 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일종의 '그리움'이 섞여있는 눈물임은 확실했다. 내가 있는 자리에 감사해하며 최선을 다해 잘해보겠다는 마음을 지닌 그때의 내가 그리웠고, 그때의 그 마음을 다시 찾고 싶었다.


  지금도 마음이 흔들릴 때면 통화 녹음 파일을 듣는다. 최종 합격 문자, 사랑하는 이들이 내게 보낸 축하 메시지까지도. 거짓말처럼 내가 있는 자리에 감사해진다. 때로는 금세 흐려지고 만 초심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손을 뻗으면 다시 찾을 수 있는 지금이라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여담이지만 엄마는 알았던 걸까, 내게 이런 시기가 올 것임을. 그래서 그 날 통화를 하다가 녹음 버튼을 누르셨던 건 아닐까. 글을 쓰다보니 무엇보다 내가 열정을 가득 안고 있던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둔 엄마께 감사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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