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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Sep 19. 2022

포용과 균형 사이

나는 아이들 편에 서야 하지만, 아이들 편에만 설 수는 없다.

  L의 담임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내게 오셨다. 우리 아이들의 원적 학급 담임 선생님께서 내게 다가오시면 덜컥 겁부터 난다. 대개 좋은 말씀을 안고 오시기보다는 반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전해 들은 소식은 L이 같은 반 친구의 물통을 냅다 바닥에 던져 깨뜨렸다는 것이었다.


  올해 우리 학교에 입학한 L은 같은 반 친구들과 자잘한 마찰이 많았다. 남중 특성상 쉬는 시간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에도 차분한 분위기는 찾아보기가 힘든데,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1학년이라 아이들은 끝을 모르고 튀어 오르는 탱탱볼 같았다. L의 반 아이들은 자주 떠들었고, 다투었고, 담임 선생님은 하필 무섭고 엄격하신 분이라 종례 시간이면 단체로 남아 혼이 나곤 했다.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성향의 L에게는 시끄러운 친구들과 지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한국에 비해 개인을 중시하는 러시아 문화의 사고방식으로는 소수의 잘못으로 인해 단체가 혼이 나야 한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친구들이 쉬는 시간에 뛰어놀다가 L의 책과 필통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날이면, 말썽꾸러기 친구들로 인해 담임 선생님의 기나긴 종례를 견디고 나온 날이면 L은 한국어 수업 시간에 벌게진 얼굴과 함께 두통을 호소하며 서툰 한국어로 화를 냈다. 짧고 뒤죽박죽한 한국어였지만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L이 그나마 유일하게 열을 내며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시간과 상대는 한국어 수업 시간, 한국어 선생님이었다.


  담임 선생님께 이야기를 전해 듣고, L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자신의 물건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화가 났고, '애들도 하는데 왜 나는 하면 안 돼?'라는 마음으로 홧김에 뒷자리에 있는 친구의 물통을 던져버렸다고 했다. 평소에 차곡차곡 쌓인 L의 스트레스를 가늠하고 있던 나는 L을 지도하면서도 L이 어떤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물건을 볼 때마다 보통의 아이들처럼 욕을 곁들이며 "이거 누가 그랬어!"라는 한 마디를 할 수 없던 L이었으니 충분히 답답했을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L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L에게 잘못된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지도한 뒤 똑같은 물통을 사 와 배상할 수 있도록 했다. 역시나 L은 왜 물통을 사 와야 하냐며 격분했다. 여태 자신의 물건이 널브러뜨려져 망가지거나 없어졌을 때 친구들은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배상하지 않았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L을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내 바람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도였는데, 답정너스러운 말만 실컷 해댄 끝에 L이 물통을 사 오기로 하였다. 하필 값이 제법 나가는 물통일 것은 뭐람. L이 같은 물통을 잘 찾아 사 올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지만, 어쨌거나 L이 책임져야 할 몫이라 생각하여 방법만 간단히 알려주고 사 올 수 있도록 당부했다. 

  그로부터 4일이 지났을 즈음 L에게 진행 상황을 물어보니, 물통을 인터넷으로 주문했고, 주말이 끼어서 다음 주에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궁금해하실까 하여 전달드리니, L의 담임 선생님은 L이 물통을 사지 않았을 거라 추측하셨다. 불신이 담긴 뉘앙스였다. 평소에 L의 선생님은 다문화 학생에 대한 선입견을 종종 내비치셨던 분이었다. 가령, 우리 반 아이가 일부러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 같다거나, 호흡기가 약해 잦은 기침을 하는 아이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고 하시는 등 듣기에 속상한 말씀을 종종 하시곤 하는 분이었다. 그러한 불신을 깨뜨려드리는 것도 나의 숙제인지라, L이 물통을 사겠다고 했고 안 사 오고 버틸 아이는 아니니 일단 다음 주까지 같이 기다려보자고 웃으며 말씀드렸다. 그리고 다행히 L은 약속한 날짜에 물통을 가져왔다.


  아이들을 가까이서 만나다 보면 교사가 보았을 때 조금 튀거나 엇나가 보일 수 있는 말과 행동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아이들의 그러한 모습에 크게 감정이 일거나 동요하기보다는, 왜 그러했을지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더불어, 이제는 화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혹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살까 봐서, 그로 인해 향후 한국에서 사는 삶이 고달플까 봐서.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다른 선생님들께 크게 혼나고 있다가 내게 인계될 때면, 요즘은 크게 혼내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아이를 부드럽게 감싸며 조용히 타이르고 설명하게 된다. 아이들도 내가 그나마 자신들을 이해하는 사람임을 아는 모양인지, 고맙게도 알아듣고 바뀌려 애써주는 편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까이서 보지 못해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게다가 아이들이 튀지 않고 순하게 말을 잘 듣기를 바라는 일반적인 교사의 마음이라면 마냥 우리 아이들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을 거라는 사실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더군다나 살아오면서 쌓인 여러 고정관념들마저 곁들여진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마냥 우리 아이들 편을 들지는 않으려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충분한 이유를 들며, 그 고정관념과 편견을 살살 녹여 가며 균열을 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되어 그렇다.


  포용과 균형 사이에서 적절한 지점에 서 있기란, 쉽지 않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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