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에 임하지 않는다

혼자이길 선택한 사람: 손절도 익절도 없도록

by 갈매나무






손절: 주가가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될 때, 추가 손실을 막기 위해 매입한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주식을 매도하는 것
익절: 주가가 매입한 가격보다 더 올라서 이익이 발생했을 때, 그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주식을 매도하는 것



주식을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된 말이다. 그런데 요새는, 주식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손절이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나 그 사람 손절했어', '걔 손절당했대'처럼 손절은 인간관계가 정리되었을 때 흔히 빗대어 쓰는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왜 익절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손절이라는 말만 쓸까. 가볍게 비유해서 쓰는 말이니 굳이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연히 든 생각에 궁금해져서 곰곰이 인간관계에 익절이라는 용어를 빗대어 생각해 보았다.





오늘도 일상에서는 다양한 인간관계가 툭, 하고 끊어지고 있다. 삭막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하나하나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중 많은 경우는 손절보다 익절일지도 모른다(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특정한 목적으로 가까워진 후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친분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것 경우, 많은 양보와 도움을 받았으면서 정작 본인이 입은 작은 손해로 인해 관계를 끊어내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관계의 정리에는 논란의 여지가 하나 있다. 끊어낸 사람이 '난 익절을 한 게 아니라 손절을 한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식 투자자의 심리는 참 묘하다. 10% 수익을 보고 파는 것은 만족스러운데, 40%까지 수익률이 올라갔다가 20%가 떨어져 20%의 수익만을 실현을 하는 마음은 유쾌하지만은 않다. 왠지 손해를 본 기분이다. 객관적으로는 이익을 본 게 맞지만 사람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에 더 집중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베푸는 마음에 만족스럽다가도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조금만 생기면 쉽게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주식과 인간관계는 크고도 안타까운 차이가 있다. 인간관계는 이익과 손해가 수치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사람이 아니라 관계 자체에 대한 이익과 손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 이익일 수도 있고, 모두 손해일 수도 있다). 객관적인 지표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관계의 끊어짐이 '익'이지 '손'인지는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손절 '당한' 경우가 많았다. 일단 관계를 먼저 끊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누군가에게 나에 대한 친밀감 이상의 기대를 해 본 적도 없었다. 내 문제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짐은 늘 나누고 싶었다. 그게 좋았다. 혹은 그게 관계의 본질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반대의 경우는 지금 당장 떠올려 보아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전학을 왔던 그 아이는 너무나 착하고 순수했다. 혼자인 그 아이의 정말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1, 2년 시간이 지나며 많은 친구들이 그 아이의 순수함과 친절함을 칭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난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내 앞에서 그들을 비웃고 욕하며 침을 뱉었다. 말 그대로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종국에는 본인의 그런 모습을 아는 나란 존재가 제일 맘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자기 반 아이들에게 울며 내가 괴롭힌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반 아이들은 '착한 네가 당할지 모른다'며 내 대역을 만들어 싸우는 연습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관계가 끝이 났다. 학년이 올라 그 반의 몇 아이들은 내게 네가 이런 애인 줄 몰랐고, 걔가 그런 애인줄 몰랐다며 사과했다. 별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오랜 시간 기다린 친구도 있었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함께 했고 서로 눈물 흘릴 때 어깨를 두드리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친구를 평생 가장 소중한 친구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는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그러고는 몇 년 후 다시 잘 지내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때도 기뻤다. 다시 연락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자, 다른 친구들은 왜 그 연락을 받아주냐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친구와 나의 관계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연락은 점차 뜸해지다가 다시 두절되었다. 그리고 내일 그 친구의 결혼식에 가냐는 다른 친구의 연락을 받았을 때 알았다.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나만의 관계였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손절을 당했다는 것은 그저 나의 주장일 것이다. 상대방도 나와의 관계를 손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서로 입장 차이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끝난 관계를 두고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피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며 생각을 점차 바꾸었다. 그들을 존중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나 스스로를 가련한 피해자로 만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 입장까지 헤아려 이해해 줄 필요는 없다. 손익을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도 없는 인간관계의 장에서 적어도 나만큼은 내 편을 들어줘야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면 앞으로 새로운 인간관계에 어떻게 임할 것인지가 남는다.
모의 주식투자 대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항상 상위권에 오른다고 한다. 그 사실에서 나는 힌트를 얻었다. 익절을 못하는 나란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은 손절에서도 멀어지게 하는 것. 손절당하는 것은 싫고, 손절을 하고 싶지도 않다. 손절 과정도 수많은 인내심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인연과 즐거움에 대한 기대로 장에 나서고 싶지 않다.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내게 편안함과 행복을 주는 관계를 잘 가꾸어 나가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그냥 나는 내 마음을 보듬으면 그뿐이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사회는 다인으로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장을 떠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다인과 모두 정서적 차원의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정서적 차원의 장에 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웃기도 하고 기분 상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바람 같은 것일 뿐 익도 손도 아니다. 그러니 괜찮다. 주식투자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내놓는다. 모두들 그 많은 것들 중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나는 나만의 답을 잘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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