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되지 않은 사람의 일기
잘 쉬고, 추석을 잘 보내고 돌아와서, 남편과 아이는 영화를 보러 갔고 나는 유튜버 오에니의 플레이리스트, Autumn Leaves를 들으며 쓰는 글.
요새의 나는 조금 게을렀다고 해야 할까. 글을 쓰지도 않았고 쌓인 일들을 착착 해내지도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마음의 벽 한 구석에 제거하지 못한 얼룩이 있기라도 한 듯 찝찝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번에는 마음 벽에 비누칠을 하고 수압 높은 샤워기로 깨끗이 닦아낸 듯 개운하기만 하다. 아마 추석 연휴를 정말 행복하게 보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가장 좋았던 일을 먼저 이야기해 보자면, 이번에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숱하게 마음먹어 놓고도 정작 집에 들어서면 시시콜콜 엄마 살림에 간섭을 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절 그러지 않았다. 차례 음식을 만들 때 엄마가 시키는 것만 잘했고, 설거지며 청소며 엄마가 허락한 것만 했다. 그랬더니, 세상에 얼마나 평화롭고 좋던지. 내가 왜 그동안 엄마도 힘들게 하고 나 자신도 후회할 행동만 했는지 싶었다. 성공이었다.
두 번째는 아빠에게 가을 점퍼를 사드렸다는 것이다. 평소 아빠는 옷에 관심이 없어서 엄마가 골라주는 대로 입으시는 편이다. 이번에 집에 내려가서 아웃렛에 가자고 말씀드렸을 때 그러면 아빠 점퍼도 하나 사야겠다고 하신 것도 물론 엄마였다. 오히려 아빠는 새벽 낚시를 다녀오셔서 피곤하셨는지 아웃렛에 도착해서부터 옷이 그게 그거 아니냐며 따라오기 귀찮아하셨다. 그런데 그중 맘에 드는 옷이 있으셨는지 눈을 반짝이며 거울 속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시는 게 너무 귀여웠다. 심지어 계산 후 종이가방에 넣게 이제 달라고 했는데도 계속 입고 서 계셨을 정도니. 그 모습에 '딸이 사드리는 거니 입을 때마다 딸 생각하시라'라고 말하는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했다. 참 좋다.
사실 요새 나는 조금은 낯선 감정을 마주하고 있었다. 뭐랄까, 특별한 사건도 없고 불안할 일도 없는데 잔잔한 우울감이 마음 저변에 깔려있다고 해야 할까. '내 안의 사람들'이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나는 내 생각들이 각각 나의 어떤 면모에 속한 것인지 어느 정도 분류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딸로서도 아니고, 고독한 사람도 아니고 걱정 많은 사람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친구가 '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웬만하면 기분 좋은 편이야'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잔잔하게 우울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조금 슬픈 사실일까. 하지만 해수면 위 3,000미터 산악지대에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약 440미터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것처럼 사람들마다 마음의 해발고도가 다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남들이 객관적인 지표를 기준 삼아 좋고 나쁨을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각자의 고도에서 사는 사람에겐 그저 발 붙이고 살아가는 땅일 뿐이다. 그러니 해수면 아래 얕은 물에 잠겨 사는 것도 내겐 당연한 일이리라.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런데 이번 추석 고향집에 내려간 것은, 젖은 옷이 포삭하게 잘 마르는, 볕 좋은 땅 위로 소풍을 다녀온 것만 같다. 위의 저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강강술래를 배웠는지, 할머니 집에 가면 달을 보며 강강술래를 하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계속 날이 흐리고 비가 내렸다. 오래간만에 내려와서 집에만 있기 아쉬우니 둘이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엄마 아빠는 나와 남편에게 외출 시간을 주셨다. 아들 잘 부탁한다고 말씀드리고 아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나왔다. 대문을 열자 환한 달빛이 소담한 마을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아들, 잠깐 엄마한테 안겨봐!"
내복만 입은 아이를 안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아들아, 저기 봐! 보름달이 떴어! 우리 강강술래 해볼까?"
"좋아요!"
아이를 안고 포근한 달빛 아래서 빙글빙글 돌며 우리 셋은 강강술래를 했다. 잔잔한 빛은 아이의 눈에서 생기 있고 환한 빛이 된다.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 주세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달을 바라보며 웃는 그 눈동자를 보며 나 또한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게 해 주세요!'
빗물로 씻어낸 듯 선명한 달처럼 깨끗해진 나의 마음. 돌아오는 날 아침에는 잔뜩 흐렸지만 마음만큼은 개운하다. 고장 난 부분을 알면 그 부분만 고치면 되지만, 전반적인 성능 저하는 앞으로 계속 신경 쓰며 돌봐주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 이번 추석 연휴 동안 그렇게 나를 돌본 것 같아 마음이 좋다.
내일이면 다시 일상의 시작이다. 요 며칠 사이 글도 쓰지 않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다. 하나가 아니라 전반적인 기력 부족이었다. 하지만 또 한 번 생각을 통해, 휴식을 통해 충분한 에너지를 얻었다. 다시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