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엄마아빠 딸: 정동길에서
타지 생활 17년째. 굳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스무 살이 되어 고향집을 떠난 순간부터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이미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이었다. 그나마 대학생 시절 방학 때는 며칠씩 부모님 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능했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육아를 하는 지금은 일 년에 몇 번 내려가기도 쉽지 않다. 서글프지만 그 시간은 앞으로 더 줄어만 갈 것이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 대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짧아도 밀도 있게.
지난주 엄마가 검진 차 서울에 오셨다. 나는 서울 지리가 익숙지 않은 엄마를 위해 기꺼이 휴가를 내고 동행을 할 생각이었다. 엄마는 바쁘지 않냐고 하셨지만, 오히려 기대가 됐다. 가족들이 다 같이 만나는 일은 종종 있지만, 엄마와 딸만 보내는 오붓한 시간이 얼마 만인지. 단풍이 절정에 이른 덕수궁을 거닐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9시에 도착해서 1시 반 예약이니 걷고 차 한잔하고 밥 먹을 시간 정도는 되리라 생각했다. 생각만 해도 좋았다.
전광판에서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가 떴다. 나는 대합실을 나섰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오는 엄마는 자주색 점퍼를 입고 계셨다. 마치 인파 속의 주인공과 같았다. 엄마는 서울 사람들은 옷 색이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며, 엄마 옷 너무 튀지 않냐고 괜히 매무시를 하셨다. 나는 너무 잘 어울린다고, 화사하다고 씩 웃었다. 그런 내게 꺼낸 엄마의 이야기. 11시 반까지는 병원에 가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금세 또 짜증이 났다.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덕수궁에 가기로 하지 않았냐며 인상을 썼다. 엄마는 나를 보며 난감해하실 뿐이었다.
나는 생각을 해야 했다. 여기서 병원으로 가면 1시간 반가량 시간이 뜬다. 하지만 그 사이에 어딘가를 가서 뭘 하기에는 시간이 애매하다. 반대편 지하철을 타러 갈지 말지 괜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고민했다. 아마 원래의 나였다면, 이 시간이 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면 다음을 기약했을지도 모른다. 계획 중 극히 일부에 균열이 생길지라도 모든 계획을 바꾸어 버리는 게 나란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시간은,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온 엄마와의 소중한 시간이 아닌가. 만약 바로 병원으로 가서 의미 없이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면 도저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이 시간을 그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찰나에 인상을 펴고, 내 눈치만 보고 계시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짧아도 괜찮으니까, 은행 떨어지는 거 보면서 커피라도 마실까?" 엄마는 말씀하셨다. "그래, 잠깐이라도 좋지. 가서 커피 마시면서 가을 구경 하자."
그렇게 우리는 시청역에서 내렸다. 옅은 서늘함과 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들, 지천에 깔린 은행잎들. 우리는 그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엄마는 15년 전쯤 같이 경복궁에 왔던 게 기억이 나냐고 물으셨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나와 언니와 함께 경복궁에 왔는데, 언니가 굽 높은 구두를 신어서 걷기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가 좋았다는 걸 모르고 지나온 시절들. 이 모든 것을 알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더 절절히 행복해 할 수 있는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난 나중에 오늘을 돌이켜 보면 오늘도 너무 행복했다고 할 것 같아. 엄마도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은행나무들을 뒤로하고 몇 장의 사진도 찍었다.
우리는 정동길에 있는 한 카페에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베이커리로 유명한 카페라고 하기에 디저트도 몇 개 시켰다. 나는 별로 먹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엄마가 예쁘고 맛있는 것을 드시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보늬밤이 올라가 있는 몽블랑 타르트와 커피를 두고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야기들은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그리 웃음만 나는 이야기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못할 이야기가 없는 엄마와 딸 사이. 카페 맞은편 저 높은 돌담보다도 더 굳건히, 비밀을 새어나가지 않게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사이. 그렇게 이야기도 하다가 커피도 한 모금 먹고, 그러다가 '아 맞다, 나 이번에 있잖아' 하면서 또 새로운 이야기도 하고, 다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기도 하고. 간간이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은행잎 정말 예쁘다, 하기도 하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병원에 11시 반경 도착해서 진료가 다 끝나니 2시가 다 되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결국 세 시가 다 돼서야 역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기차에 오르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생각했다. 만약 오늘 병원으로 그냥 갔다면 어땠을까. 왠지 모를 죄송한 마음에 나는 지금쯤 혼자 눈물을 훔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중에 오늘을 다시 돌이켜 본다면, 과연 내가 덕수궁도 가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는 그런 계획을 지키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게 될까, 생각했다. 아니었다. 물론 몇 장면이 더 머릿속에 떠오를 수는 있겠으나, 그냥 오늘을 나중에 돌이켜 보게 될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행복했었노라고 기억할 것이다. 그러면, 그렇다면 오늘도 충분히 좋은 것 아닐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엄마 아빠와 통화를 하면, 나는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두 분은 언제든 내려오라고, 왔다 가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가는 데 오는 데 걸리는 시간 생각하면 내려가 봤자 잠깐 있다 와야 한다고, 나중에 내려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정동길에서의 한 시간에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잠깐 있다 오더라도 자주 내려가야겠다고. 짧아도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