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휴가를 냈습니다. 당일에 갑자기 휴가를 내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려서, 26일이나 29일에 휴가를 낼지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왠지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결국 휴가를 내버렸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다를 게 없는데 말입니다. 24일이면 어떻고, 26일이나 29일이면 어떻습니까. 휴가를 내면 하는 일은 어차피 늘 책 읽기, 글쓰기, 커피 마시기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그 각각의 날짜에 부여하는 저만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겠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이브는 따뜻하고 포근한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이 절정에 이른 날입니다. 거리에서든 가게에서든 트리가 은은한 빛을 내고, 신나고 잔잔한 캐럴들은 귀를 즐겁게 합니다. 이 분위기 속에 휴식을 누리는 건 24일이 아니면 안 되죠. 물론 요새는 연초까지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치우지 않는 가게도 많지만 그냥 그건 지난 성탄절에 대한 여운으로만 느껴질 뿐입니다.
어제는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크리스마스 맞이 피자를 만들었다며 가져왔습니다. 저녁으로 세 식구가 한 조각씩 나누어 먹었어요. 정말 맛있었습니다. 요즘 색다르고 맛있는 피자들이 참 많아요. 그런데도 아들이 만든 피자는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한 입 먹는 순간 어린 시절 먹던 피자 맛이 생각났거든요.
어렸을 적 시골에 살 때, 배달 음식을 먹어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치킨은 매주 전국노래자랑이 끝나고 '영심이', '달려라 하니' 같은 만화가 시작할 때 시켜 먹었는데, 피자를 시켜 먹는 일은 드물었어요. 피자 가게가 동네에 없어 차로 20분 거리인 시내에 있는 가게에서 주문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먼 거리를 배달을 해주었다는 것도 신기해요). 어쨌든, 그 피자를 시켜 먹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나홀로 집에'를 틀어두고, 상을 펴서 삼 남매가 라지 사이즈 콤비네이션 피자를 먹던 기억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맛이 아들이 만든 피자에서 그 맛이 났고요.
남편과 아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순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은 또 다른 행복한 시절이었어요. 눈을 감고 가만히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그렇게 피자를 먹고 있을 때, 바깥은 햇볕은 쨍한데 눈이 아직 녹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빠는 2층에서 TV를 보고 계셨을 거예요. 엄마는 주방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반찬을 만들고 계셨던 것 같고요.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던 것 같네요. 모두가 훨씬 더 젊고 어렸던 시절. 너무 생생하게 그려지기에, 행복을 형태로 만들 수 있다면, 지금의 행복만큼이나 그 시절의 행복도 정교하게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넓고, 푹신푹신하고, 쭈욱 잘 늘어나는 것으로요.
행복을 비교한다는 건 쉽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행복 안에 담긴 모습과 냄새, 소리까지 다 다르니까요. 혹은 각 행복마다 부족한 결여된 요소가 하나씩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요. 다른 요소들만으로도 이미 행복이 완성이 되었다면요.
뚜렷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저는 행복이란 '완전한 상태'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습니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어야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요. 물론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잘 발견한다는 건 제 장점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행복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소소한 행복의 순간이 지나가면 제 인생에 불완전한 요소들이 절 괴롭혔으니까요.
그런데 요새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얼마나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충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요. 또 TED에서 '완벽주의'에 대한 강의를 보았는데요, 강연자는 '완벽주의는 일에 대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완벽하기를 갈구하는 것이나,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불행해진다'라고 설명하더군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도 새해에는 불완전함을 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삶의 순간순간들을 잘 조물조물 만지다 보면 불완전한 무언가가 있더라도 충분히 행복의 형태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네요. 어쨌든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