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문PD Sep 23. 2021

내가 내 아이를 죽였다고요?

타인에 대한 오만한 편견

"좋은 소식 전하러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이 직업의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살면서 웬만하면 만날 일 없을 사람들을 만나 몇 시간이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여호와의 증인도 있다. 어린 시절 학교 일찍 마치고 집에 혼자 있는 토요일, 톡톡톡 현관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면 아주머니 두 분이 서서 '좋은 소식 전하러 왔다'고 말하는 풍경으로만 남아있는 여호와의 증인을, 이제는 내가 거꾸로 찾아가는 일이 생긴다.

 

몇 해 전 한 선배가 기사 하나를 프린트해 줬다. 내용은 다섯 문장으로 정리됐다.


1. 아기가 죽었다.

2. 태어난 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은 아기였다.

3. 수술 중 수혈이 필요하다고 병원은 주장했고

4. 부모는 수혈을 거부했다.

5.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다.


다섯  줄짜리 흔한 비극. 키워드는 '여호와의 증인'. 뻔했다. 종교적 신념이라는 미명 하에 수혈을 거부해 아이를 죽게 한 비정한 부모. 흔하디 흔한 얘기. 한 뉴스통신사가 쓴 기사를 여러 신문사가 받아썼다. 기사들은 부모의 왜곡된 종교적 신념을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준엄하게 꾸짖었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라고.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훨씬 노골적이었다. '아이가 종교보다 우선이면 부모 될 자격 없다', '이건 살인이다', '부모를 처벌해라'.


아이가 죽은 비극 앞에 '뻔하다'는 수식어가 얼마나 비정하고 무심한 지를 알면서도, 그러나 그런 스토리를 쫓아가는 직업적 습관은 뻔한 얘기에 또 다른 뻔한 소리를 보탤 필요가 있을까라며 싸늘해진다. 선배에게 물었다.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잖아?

무거운 머리를 헤드레스트에 기댔다. 스타렉스는 버스전용차선을 달려 지방의 어느 신축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옅은 젖비린내가 풍기는 집

초인종을 눌렀다.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긴장됐다. 아, 만나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만나러 가는 건 처음이었다. 현관 문이 열리자 한 눈에도 젊은 부부가 서있었다. 아기 냄새가 열리는 현관문을 따라 훅 밀려왔다. 거실에선 세 살쯤 됐으려나, 남자 아이가 아장아장 걷고 있었다. 태어나 두 달을 채 살지 못하고 죽은 아이의 오빠였다. 비극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거실엔 햇볕이 잘 들었다. "괜찮으시면 마이크 좀 채워드릴게요." 부부는 거실 창을 등지고 앉았다. 카메라 화면에 콘트라스트가 맞지 않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광량이 많아 부부의 뒷배경을 하얗게 날려야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순백의 배경에 부부가 앉아있는 모양새가 됐다. 어린 자식을 죽인 비정한 부모를 표현하기엔 부적절할 정도로 따뜻하고 밝은 공간.


인터뷰 내내 부모는 울지도, 울먹이지도 않았다. 담담했고,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내가 찾아 읽고 간 기사와는 많이 달랐다. 아이를 죽인 부모라 욕먹어도 그들이 울지 않아야 할 이유들이었다.


젊은 부부는 둘째를 임신했다. 뱃속 아이가 잘 자라는 것 같았는데, 검사 결과 심장에 기형을 안고 있었다. 아이를 지워야 할 지도 모르는, 지울 수도 있는 상황에서 부부는 결심했다. 뱃 속 아이의 태명을 '희망이'로 지었다. 어떻게든 낳아서 치료해줄테니 희망을 잃지 말자고 뱃 속 아이에게 말걸면서 불러준 이름.


그래서 부부는 뱃속 아이와 함께 매주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았다. 신생아 심장을 수술해 줄 수 있는 종합병원. 한 가지 조건은 있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수혈을 받을 수 없으므로, 수혈하지 않고도 아이의 심장을 수술해 줄 수 있는 의사가 필요했다. 그걸 해줄 수 있는 병원이 있었고, 병원은 수혈 없이 수술하기로 약속해주었고, 아이는 태어났다. 하지만 곧 병원이 태도를 바꿨다. 수혈해야 한다고. 부모는 당황했다. 약속하셨잖아요? 병원은 대답을 거부했다. 부모는 그럼 다른 의사나 병원을 소개시켜달라고 했다. 병원은 다른 병원이나 의사를 소개해주는 대신, 수혈이 동반된 수술을 강행하겠다며 오히려 부모를 상대로 진료업무 방해금지 등의 가처분 소송을 냈다. 믿었던 병원이 오히려 소송을 걸어오자 부모는 인터넷을 뒤져 수혈하지 않고 수술할 수 있는 다른 병원과 의사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수혈하지 않고 신생아 심장을 수술해 수 차례 성공한 의사와 병원을 마침내 찾아냈다. 국내 최고의 병원이었다. 그래서 그 병원으로 아이를 옮겼다. 하지만 아이는 수술대에 오르기도 전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망원인은 수혈거부가 아니라 패혈증이었다. 아이가 안고 있던 심장 기형과도 무관한 죽음이었다. 허망했고, 허망했다.


그런데 이들에게 닥칠 비극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어떻게 알았는지 한 뉴스통신사 기자가 기사를 썼다. "왜곡된 종교적 신념으로 아이가 죽었다." 한 마디로, 부모가 아이를 죽였다는 말이었다. 그 기자가 부모를 찾아오거나 전화 한 통 거는 일도 없었다. 부모는 변명할 기회도 없이 기사가 났다. 부모는 친 자식을 죽인 악마가 됐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우는 건 사치라고 생각한 것일까. 둘째의 죽음보다 무거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젊은 부부는 인터뷰 내내 담담했다. 나는 각종 의료기록과 병원 관계자 청취를 통해 부부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나는 아이의 엄마에게 물었다. 혹시 죽은 아기의 물건 같은 게 있으신가요? 두 시간 가까이 앉아있다가 일어나려니 어지러웠다. 아이 엄마도 잠시 휘청댔다. 그녀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장롱을 열어 그녀는 작고 뽀얗고 하얀 겉싸개를 꺼내 보였다. 아이가 퇴원하면 데리고 집에 올 때 감싸려고 그녀가 직접 만들기 시작한, 그러나 병원이 말을 바꾸면서 아이의 수술일이 잡히지 않는 바람에 결국 완성하지 못했고, 그래서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그래도 버리지 못한 미완성된 겉싸개였다. 그녀가 겉싸개를 펼쳐 보이자 빨래 냄새가 옅게 퍼졌다. 그녀의 손이 겉싸개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관행이 그래요

기사에 나온 것처럼 부모가 수혈을 거부해서 아이가 죽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는 아이를 살리려고 했다. 아이는 패혈증 때문에 죽었다. 사망진단서를 확인했고 의사들에게도 물었다.  수혈하지 않고 수술하는 의사들도 많고,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무수혈 수술을 원하는 환자들도 많다고 했다. 수혈거부로 아이가 죽었다는 기사는 100퍼센트의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그 기자는 최소한의 사실 확인 없이 기사를 썼을까. 그 기사는 수십개 언론사가 따라 썼다. 기자는 왜 '왜곡된 종교적 신념으로 아이가 죽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아이 잃은 부모의 심장에 칼을 꽂았을까.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답은 황당했다.


"의학적인 직접사인은 패혈증인데 인과관계는 있다는거죠."

사망진단서에도 나와있고 의사들도 아이 사망 원인은 수혈거부와 무관하다고 말하는데, 그 기자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근거는 없었다.


'왜곡된 종교적 신념으로 아이가 죽었다'라는 제목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목 뽑는 관행이 그래요."

"네?"

"PD님은 기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취재 기자가 기사쓰면 편집 기자들이 제목을 뽑거든요. 제목 뽑는 관행이 그렇고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혈 거부하는 것도 다 아는 얘기잖아요."


선천성 심장 기형을 가진 뱃 속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서울로 오가는 왕복 네 시간 고속도로에서 슬픔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의사에게 수혈하지 않고 수술해 달라고 거듭 부탁하며 거듭  약속받았으나 결국 배신당한 채 아이를 가슴에 묻어야했던 젊은 부부는 '기자들의 관행' 때문에 '아이를 죽인 악마'가 됐다. 전화기 너머로 그 기자는 몇 마디 더 보탰다. "이거 방송하시면 저희 쪽에서도 조치를 취할 생각입니다." 여호와의 증인 부부에 대해 사과할 생각 없으시냐고 내가 물었고, 그는 대답이 없었고, 방송은 나갔고, 그 통신사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https://youtu.be/Y1kiQsXmqCU

섬세하게 치열하게

이 사건을 접한 지 7년 뒤에 이언 맥큐언의 소설 <칠드런 액트>를 읽었다. 이야기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등장한다. 18세가 되어야 법적인 자율권을 보장받는 영국. 주인공은 17살 남자아이 애덤. 세 달만 더 살면 18세가 되니까 소년에게는 법적 자율권이 '거의' 확보된 셈이다. 문제는 그가 아프고, 곧 수술대에 올라야 하며, 그 수술에는 수혈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고, 그 부모 역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 부모가 반대하더라도 아이 본인이 희망하면 수혈할 수 있을 텐데, 아이 역시 확고하게 수혈을 거부한다. 코 앞의 죽음을 그대로 끌어안겠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년.


<칠드런 액트>는 이 아이에게 수혈을 강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가정법원 판사 피오나의 고민을 아주 세밀하게 전개하는 소설이다. 이언 맥큐언은 실제 판례와 기사들을 참고해 소설을 구상했다. 그래서 소설은 여호와의 증인 수혈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법정 공방을 자세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


수혈해야 한다는 병원 측 입장

"창세기와 레위기와 사도행전은 피를 먹는 것을 금하며, 어떤 구절에서는 피를 멀리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신세계역 성경의 창세기를 예로 들자면 '고기를 그 생명, 즉 피가 있는 채로 먹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럼 수혈에 대해선 아무 얘기도 없는 거죠."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본을 보시면 원문에 '몸 안으로 받아들이다'의 뜻이 포함된 걸 아실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철기시대 문서가 쓰인 시기에는 수혈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없는 걸 금지할 수 있을까요?"


수혈을 거부하겠다는 환자 측 입장

"의료 선택의 자유는 성인의 기본적 인권이라는 점,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그리고 동의 없는 치료는 신체 침해에 준하는, 또는 실제로 폭행에 준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리고 애덤은 성년에 아주 가깝습니다. 이런 경우 법이 정의하는 기준대로라면 말이지요."


종교와 법이 충돌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제시하는 이 소설을 읽다가 문득 세상을 떠난 갓난아기와 그의 젊은 부모가 생각났다. <칠드런 액트>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수혈 문제를 '관행'으로 다루는 기자도 없고, '관행'대로 판결하는 무심한 판사도 없다. 병원과 환자 각각의 변호인들은 치열하게 논박하고, 판사는 사려 깊게 질문한다. 너무 이상적인가? 내가 만난 그 부부가 <칠드런 액트>에 묘사된 이런 공간에 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타인의 신념에 대한 어떤 태도

집총 거부, 투표권 행사 거부, 수혈 거부 등의 이슈로 여호와의 증인은 종종 언론에 등장한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 법과 상식의 기준만으로 옳고 그름을 말하기는 어렵다. 믿음을 이성의 언어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테니까. 다만 타인의 신념과 믿음을 해석하는 우리의 '관행'이 때로 진실을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 타인을 쉽게 이해하려고 동원하는 오만한 편견이 누군가의 인생을 무심하게 파괴할 가능성은 너무 크기 때문에.

이전 05화 어떤 전문가들은 거짓말을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