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문PD Sep 23. 2021

기록할 만한 지나침


지하철 6호선 응암행 차량 1-4칸 기둥에 기대서서 유튜브가 추천한 한예종 졸업작품이라는 영화 '유월'을 보고 있었다. 에어팟 1에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 따위 없으므로 지하철 소음을 가리기 위해 휴대폰이 경고하는 것보다 더 크게 볼륨을 높였다. 러닝타임 25분 중 13분 24초에 이르는 동안의 내용은, 정체 불명의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춤을 추게 되는 상황이었다. 감염된 사람들이 춤을 춘다, 는 영화의 설정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 중인 지금과 참 겹친다 싶어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지하철을 둘러봤다.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화면과 맨눈 앞 현실이 닮았다 싶어 묘하게 공포스러웠다. 지하철은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지하철에서 내릴 때가 됐으므로 pause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ㅡㄴ다고, 죽인다고"라는 여자의 말이 귓구멍을 막고 있는 오른쪽 에어팟 너머에서 들려와 흠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이제 막 점을 뺐는지 곳곳에 새 살 차오르라고 여러 개의 듀오덤 밴드를 붙인 50대 여성의 얼굴이 내게 말을 하고 있었다. "네?"하고선 에어팟을 양 귓구멍에서 빼자마자 


"휴대폰 하느라 못들었죠?"

라고 여자가 묻는다. 


"네"

"그쪽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죽인다고 칼로 찌른다고 중얼거려가지고 너무 무서워서 나 지금 내리잖아요. 못들었죠?" 

"네?"

"귀에 꽂고 있으니까 못들었네에. 어떤 아저씨가 칼로 죽일거라고 혼자 막 뭐라뭐라 그랬잖아요."


놀라서 내 왼쪽 어깨를 받치고 있던 기둥에서 한 걸음 물러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 사람 옆칸으로 넘어갔어요. 아유 무서워 무서워."


1-4칸와 2-1칸 사이의 연결 통로 유리문 너머를 쳐다봤다. 거기엔 걷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보느라 못들었죠? 아으 소름끼쳐."


순간,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자리에 앉아 칼로 죽일거야 찔러 죽인다며 중얼대는 살기어린 남자와 그 객차에서 한예종 영화과 졸업 작품에 빠져 볼륨을 한껏 키운 채 아무것도 모르고 서 있는 유일한 승객인 나 사이에는 지름 10cm도 채 안 될 객차 기둥만이 앙상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날이 풀려서 걸친 얇은 코트와 때 이르게 찾아입은 봄 맨투맨 티셔츠를 뚫고 내 옆구리를 빠르게 서 너번 찌르고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이 멈추고 객차 문이 열리자 여자는 또 다시 비명 같은 한숨을, 지르듯 내쉬더니 남자가 넘어간 2-1칸 쪽을 살피며 플랫폼으로 발을 내딛었다. 나도 여자를 따라 내렸다. 여자는 내 얼굴을 빠르게 다시 한 번 훑더니 내 대답을 필요치 않는 말투로 


"휴대폰 하느라 몰랐나봐."

라고 말하고는 출구쪽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스크린도어가 닫히고 지하철이 떠나기 시작했다. 점점 빠르게 스쳐가는 객차 안쪽을 살피며 얼굴도 목소리도 옷차림도 그 무엇도 모르는 어떤 남자의 모습을 찾으려해보았지만, 나는 그 남자의 무엇도 알지 못하므로 서둘러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가 인포데스크에 앉아 있는 공익 요원을 창문을 두드려 불렀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여자의 말을 전했다. 내가 전할 수 있는 정보는 내가 1-4칸에서 내렸다는 것 뿐이고, 그 남자에 대해서는 묘사할 수 있는 게 없었으므로 공익 요원은 내게 더 물은 게 없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어 어딘가에 


"상선 방향에 칼로 죽인다, 찌른다는 남자가 있다고 승객이 얘기하십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리고는 뭔가 답을 기다리는 내 얼굴을 보며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상하고 불안하고 묘한 안도와 불길한 공포가 뒤섞인 오후였다. 네이버 클릭->검색창에 '6호선' 치고 엔터->검색탭에서 '뉴스'를 선택하고->'최신순' 정렬 탭을 클릭하니, 나쁜 속보는 보이지 않는다. 옆구리 10센티 미터 옆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나도 모르는 새에 종료된 채 제3자의 목격담으로만 남았고, 나는 그 목격담을 이렇게 기록한다. 세상의 밝음보다는 어두운 이야기를 쫓아다니는 직업인의 특성상 기록해둘만한 순간이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극이 벌어지기보다는 벌어지지 않은 세상이길 바라는 직업윤리의 발현이 공익 요원 신고로 이어진 것이라는 해석이 필요한 액션이었다. 그나저나, 영화는, 내 손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