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문PD Sep 23. 2021

나보다 어린 아버지를 만나는 일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아버지 루시앙 까뮈는 1차세계대전 중 1914년 마른 전투에서 전사한다. 가난한 농부였다가 참전한 전쟁이었다. 사망 당시 29세였던 루시앙 까뮈에게는 한 해 전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난 아들 알베르 까뮈가 있었다. 그러니까 까뮈의 아버지는 까뮈가 태어나기 전후로 내내 전장에 있다가, 태어난 아들을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거다. 마찬가지로 까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수 없는 아들.


까뮈의 어머니는 스페인인이었고 알제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까뮈의 어머니는 까뮈에게 '어른이 되면 프랑스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아버지의 묘에 찾아가보라'고 했다. 가난한 탓에 프랑스에 있다는 남편의 묘조차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까뮈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프랑스 국립묘지에 묻힌 아버지를 찾아간다. 관리인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대고 그의 안내에 따라 늘어선 묘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으며 걷다 마침내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의 이름 아래 적힌 생몰연도를 보니 까뮈 앞에 누워있는 아버지는 29세에 생을 마감했고, 그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은 아버지보다 나이든 어른이 됐다. 까뮈는 자신보다 어린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https://www.imdb.com/title/tt0114478/

비슷한 이야기가 웨인 왕 감독의 영화 <스모크>, 그리고 이 영화의 원작인 폴 오스터의 소설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도 나온다. 알프스 산맥 가까이 살던 어린 부부가 있다. 스키타는 걸 좋아했던 남편은, 그날도 설산을 올랐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남편은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눈사태에 갇힌 채 사라져버린 남편의 아내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훗날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청년으로 자란 아이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아버지처럼 스키타는 걸 좋아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아들은 엄마가 싸준 샌드위치를 가방에 넣고 산을 올랐고, 스키로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다 배가 고파질 무렵 마침 눈 앞에 보이는 평평한 바위에 걸터 앉았다. 숨을 고르며 가방에서 꺼낸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무심코 내려다본 발치 끝에 거울이 놓여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봤다. 바람에 덮혀있던 눈발이 날리자 그 아래에 보인 건 거울이 아니라 얼음덩어리였고, 그 얼음덩어리 안에는 한 남자가 죽은 채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그걸 거울이라고 순간 착각했던 이유는 죽은 남자가 자신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거꾸로. 살아있는 청년이 얼음 속 죽은 남자를 닮아있었다. 발견된 시체는 수십년 전 죽은 아버지였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이상한 건, 꽁꽁 언채로 발견된 아버지가 살아있는 아들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PD수첩 <천안함 생존자들의 증언> 편 방송을 앞두고 떠오른 건, 천안함 전사자 명단을 보다가 그 이름 아래에 적힌 나이와 유가족 때문이었다. 전사자 중 아이가 있었던 분들의 나이는 많게는 40세부터 적게는 29세였고, 천안함 사건이 올해로 11년째니까 이분들의 유자녀 중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진 자녀는 아직 없을텐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까뮈가 자신보다 나이 어린 아버지를 만났듯이 시간이 지나면 천안함 유자녀분들도 어느덧 자기보다 어린 아버지를 만나게 될텐데 그때까지도 천안함이 지금처럼 정쟁의 소재와 잔인한 음모론의 재료로 쓰이고 있다면 그만한 비극이 더 있을까. 

까뮈는 국립묘지에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버지를 만난 다음, 소설을 한 편 쓰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사고 당시 그가 지니고 있던 가방 속에는 집필이 채 끝나지 않은 미완성원고가 들어있었다. 그 원고는 까뮈 사후에 <최초의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는데,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천안함 전사자들과 그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일찍 잃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부디 미완성된 상태로 남게 되지 않기를. 

그러고보니 까뮈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처음 읽은 스무살 때 나는 '언제쯤 나보다 나이 어린 아버지를 만나게 될까'를 속으로 세어보곤 하며 '아직이네 한참 남았네' 했는데, 어느덧 무덤에 누운 내 아버지보다 나이들어 버렸다.

이전 03화 해고를 당했으니 소설을 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