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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문PD Sep 23. 2021

해고를 당했으니 소설을 쓴다

해고당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인생의 어두운 순간, 기댈 곳 없는 이들이 찾는 비빌 언덕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는 탐사보도의 특성상 그렇다. 게다가 비극은 벼락처럼 온다. 실제로 눈앞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본 적은 없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온 해고를 당한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 속에서 헤맨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랬다. 비극을 자주 접하다보면 문득 겁난다. 혹시 나는? 점심 시간 큰 서점, 창업 코너에 서서 책을 들었다 놨다하는 정장 입은 사람들의 풍경 속에 나도 들어있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영화사 직원이었던 주인공 벤(니콜라스 케이지)도 상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다. "Ben. We're gonna let you go, okay?" 회사는 벤에게 '이제 너를 떠나보낸다' 혹은 '이제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버리는' 거다. 그리고 벤은 버림받은 사람처럼 해고 이후 정말 술만 먹는다. 다 놔버렸다. 어찌할 바 모르는 그런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먹고...죽자...


해고당한 사람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소설가 '리 차일드'다. 리 차일드는 방송국에서 짤렸다. 영국 맨체스터 그라나다 방송국에서 송출감독으로 20여년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랬기 때문에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해고 당하자 '6달러 짜리 펜과 노트'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19권의 시리즈 소설을 펴내고 떼돈을 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방송국 해고자 스토리다.

   

리 차일드/blogs.wsj.com

해고당한 또 다른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잭 리처'. 해고자 중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캐릭터다. 미 육군 소속 헌병이었는데 구조조정 과정에서 소령으로 전역한다. 일을 그만두기엔 너무 젊은 때. 195cm의 키, 100kg이 넘는 몸무게. 군수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사건을 조사했던 남자다. 이 남자는 방송국 해고자 리 차일드의 첫 소설 데뷔작 <추적자>의 주인공이다.


<추적자> 속 잭 리처는 '해고당했다'는 사실 자체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평생을 군부대에서 자라왔고 자신 역시 헌병 수사관이었기 때문에 부대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해고 당한 이후 미국을 여행하면서 해방감을 느낀다. 별 계획없이 되는대로 미국을 여행하던 잭 리처가 '블라인드 블레이크'라는 재즈 아티스트가 살해당한 동네를 우연히 들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치 강릉 가는 길에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소설가 이효석 생가가 평창에 있단 얘기가 문득 생각나서 별 생각없이 한 번 그 동네에 들러보는 것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재즈리스트의 이야기가 묻혀있는 동네를 구경하러 간 건데...


금요일. 낯선 동네에 일단 내렸고 배가 고프니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잭 리처는 달걀을 다 먹고나서 커피로 입가심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경찰 두 명에게 체포된다. 살인혐의다. 지나가던 동네일 뿐이었는데 영문도 모른 채 감금됐다. 물론 군대에서 받은 훈련과 실전에서의 경험이 몸에 밴 그로서는 경찰 두 명쯤 제압하고 도망가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쉬운 일이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순순히 경찰을 따른다. 하지만 경찰서장이 막무가내로 잭 리처를 살인자로 지목하면서 일이 꼬인다. 임시로 교도소 미결수 유치장에 갇히게 되는데, 이 때 본격적인 문제가 생긴다. 미결수만 따로 구금하는 유치장에서 주말을 머물러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그가 갇힌 곳은 기결수들로 가득한 구역. 그것도 무척이나 험하고 거친 사내들, 여기서 인생 쫑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로 패고 때론 죽이는 그런 곳. 특히 자신과 같은 신참은 교도소 내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서 공격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자칫하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평가하자. 오랜 경험을 통해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을 배웠다.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을 때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혹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남의 탓을 해서도 안 된다. 누구의 잘못인지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음에 똑같은 실수를 저리르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다 나중에 할 일이다.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평가를 해야한다.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불리한 면을 찾아내야 한다. 유리한 면을 판단해내야 한다. 그에 따라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해내고 나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 나중에 다른 일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86쪽)


이 대목에서 왠지 방송국에서 해고당하고 6달러 짜리 펜과 노트에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을 리 차일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20년 간 근속했던 직장이 경영상 이유로 구조조정을 해야한단다. 구조조정의 대상이 자신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터. 그런데 회사가 나가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20년 동안 생계를 책임져주던 회사가 나를 발가벗겨 세상 바깥으로 쫓아내다니.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불안이 엄습하지 않았을까? 회사 안에서야 20년 경력의 베테랑 송출감독이지만, 회사 바깥에서는 신참 그것도 나이 마흔의 구닥다리 신참일 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처럼 술이나 먹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리 차일드는 6달러짜리 펜과 노트를 든다.


갑자기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이 어떻게 추리소설 쓰기를 결심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리 차일드는 잭 리처의 입을 통해서 하고 있다.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을 때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혹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일단 지금은 상황을 평가하고 분석해서 이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끌어갈 방법을 생각하라는 게 리 차일드의 주문이다. 이제 막 해고 당해서 뭘 해야할 지 몰라 헤맸지만, 일단 소설을 쓰고 보자고 결심하며 스스로에게 주문한 듯한 이야기.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해고당하면 나도 리 차일드처럼 펜과 노트를 들 수 있을까. 책 속에서 해고당한 잭 리처와 책 바깥에서 해고당한 리 차일드의 이야기가 투 트랙으로 마음을 두드린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거냐'고 묻는 걸 일단 미루고, 지금 이 순간의 할 일에 집중하자.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당장하자. 함정에 빠졌다면 왜 함정에 빠진 거냐고 자문하는 대신 함정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자. 그래서 나도 일단 쓴다. 쓰는 일 밖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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