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전. 복싱 체육관에 왔다. 오전에는 확실히 여유가 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도 평화로워 보였다. 오전이라 굳어있던 몸을 조금 더 풀어보기로 했다.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또 했다. 근육의 회복이 느리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면서 내 몸의 상태를 한번 살펴보는 것이다. 오늘은 오른쪽 어깨가 불편하다. 원 투 펀치를 날릴 때는 괜찮은데. 오른 훅을 날릴 땐 어깨 안쪽에 통증 있다. 이대로 연습을 하다가 탈이 날 수 있다.
열심히 몸 풀고 있어요.~~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다른 분들이 운동을 하러 왔다. 줄넘기 돌리는 소리가 난다. 펀치를 날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어느 정도 몸이 풀려 줄넘기와 아령을 챙겨서 자리로 돌아왔다. 줄넘기를 시작했다. 오전이라 몸이 무거울 것 같았는데. 그래도 가볍게 잘 돌아간다. 확실히 2개월 전보다 줄넘기 하나는 정말 많이 늘었다. 오늘 줄넘기는 3세트가 아니라 4세트를 할 거다. 땀을 좀 내고 싶다. 줄넘기를 끝내고 펀치 연습을 시작했다. 여전히 오른쪽 어깨가 불편하다. 펀치 연습을 하면서 중간중간 마사지를 했다. 몸에서 열이 나니 어깨 움직임도 조금씩 좋아졌다.
펀치 자세 연습을 끝내고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 연습을 시작했다. 어퍼-훅-투 자세 연습을 시작했다. 모든 펀치마다 발을 움직여야 한다. 쉽지 않다. 특히 마지막 투 펀치를 날릴 땐 오른발과 골반을 회전시켜 줘야 한다. 회전이 잘 될수록 펀치의 가속도가 좋아진다. 샌드백 연습을 많이 할수록 링 위에서 하는 미트 연습이 잘 된다. 그래서 진짜 열심히 샌드백 연습을 오랜만에 하고 있다.
그때 다른 분이 링 위에 올라갔다. 복싱체육관에 오는 그녀들 중 한 분이다. 힐끔힐끔. 가끔은 대놓고 그녀가 링 위에서 미트 연습하는 모습을 본다. 역시 멋지다. 파란색 반바지를 입고 운동을 하는 그녀의 스텝과 펀치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상상의 세계로 빠지게 된다. 분명 저분은 운동을 하셨을 거야. 혹시 체대를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체대까진 아니더라도 운동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진짜 잘하시는 분일 거야. 뭐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생각 끝은 항상 '저분과 친해지고 싶다.'이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 누구나 똑같다.
샌드백을 치면서 여전히 링 위에서 연습하는 그분을 신경 쓴다. 그런데 갑자기 괴성이 들렸다. "으~윽! 힘들어." "헉헉헉. 으~~ 윽!" 순간 웃음이 났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저 링 위에 올라가면 나만 괴성을 지르는 게 아니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또 생각이 났다. 그전에도 링 위에서 운동을 하던 다른 회원분들도 똑같이 괴성을 질렀다. 어떻게? 으~~~ 윽. 뭐 이렇게. 그리고 내뱉는 말이 거의 똑같았다. 아우, 힘들어. 저 작다면 작은 링이라는 공간에만 올라가면 나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똑같이 힘들어한다. 힘듬에 차이는 있겠지만.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자신만의 링에 있다. 그 링 위에 올라가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안 그러면 펀치를 맞으니까. 그래서 링 위에서는 공격을 해야 한다. 발을 움직이고 팔을 뻗으면서. 하지만 가끔은 그 공격이 어이없게도 빗나갈 때도 있다. 공격을 하다 도리어 얻어맞을 때도 있다. 그러다 결국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떠오른다. 힘들다. 너무 힘들다. 죽겠다. 언제 끝나나. 그만 끝내고 싶다. 꼭 나만 힘든 것 같아. 너무 괴롭다. 그런데 나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링 위에 올라가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힘들다. 똑같이.
링 위에 올라간 모든 사람이 똑같이 힘들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놓인다. 나만 죽을 것 같은 게 아니니깐.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좋아. 그렇다면 오늘 링 위에서는 열심히 힘들어해 주겠어. 열심히 괴성을 질러주겠어. 없던 자신감이 생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힘든 괴성을 들어줄 것이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