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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Apr 13. 2024

D+136) 출산 전에 기획했던 앱이 출시되었다


 제품 관련 공부나 비즈니스 영어 회화와 같은 하드 스킬들은 닥치면 다 하게 되겠지만, 출산 자체가 여자의 몸과 마음에 엄청난 비가역적인 변화들을 불러오는 사건이라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고 예전같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겸허하게 비우는 일이 진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내가 제일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이 모든 변화에 대한 수용이 가능해질 것 같다. 커리어의 새로운 시작점도 그 곳에서부터 겠지. 

아기 키우는 일상에도 어느덧 조금씩 적응해갈 무렵, 회사 동료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출산 전에 기획했던 앱이 드디어 출시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새로운 앱을 초기 기획부터 출시까지 지켜보는 경험도 처음이거니와 기획은 다 해놓고 QA 하다가 출산휴가에 돌입했으니 애를 애지중지 키워서 시집보낸 것처럼 아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었다. 한편으로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아기를 낳으러 간 나를 '그만둘 사람'으로 간주할 법도 한데 챙겨서 카톡을 보내 주니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앱을 설치해서 훑어보니 기획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부분이 현지 피드백을 받으면서 바뀌었는지 훑어보며 '이건 이래서 바꿨구나, 저건 왜 바뀌었을까?' 속으로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간다. 그래도 내가 기획했던 기능들이라 매의 눈으로 작은 오류 하나를 찾았는데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앞선다. '그래도 내가 기획했으니 한번 써 보고 알려주면 도움이 되겠지' 하며 화면 영상을 찍은 뒤 나에게 연락을 주었던 개발자분께 살짝 전달했다. 오랜만에 하는 업무 관련 연락이라 긴장했는지 내 핸드폰 기종과 앱 버전을 깨알같이 적어서 같이 전달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슈라고 하면서도 고맙다고 하니 나도 뭔지 모르게 찡하고 고맙다. 코끝이 괜스레 찡해진 건, 매일 제품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프로젝트를 조금 더 잘 이끌 수 있을까, 기획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현지 직원 분들과 영어로 어떻게 하면 잘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도 줄여 가며 열심이었던 시간이 떠올라서다. 아기가 하루하루 몰라보게 크며 너무 예쁘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절의 반짝이던 내가 눈물 나게 그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출산 후 아기와 하루 종일 보내면서 아기 옹알이를 따라 하고, 고작 하는 말이라고는 '까꿍', '강아지는 멍멍, 고양이는 야옹~' 이런 것들뿐인 날들이 몇 달간 이어지다 보니 언어능력이 현저히 떨어짐을 느낀다. 그나마 육퇴를 하고 나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대신 책이나 신문을 읽고 있기도 하고 브런치 글도 주기적으로 발행하고 있어서 이 정도로 유지되는 것 같기는 하다. 한창 개발자와 디자이너 분들과 소통하면서 모르는 용어나 커뮤니케이션에 걸림돌이 되는 어려운 표현들에 대해 공부해 나가고 있었는데 이러다가 복직을 하면 진짜 한 개도 못 알아듣는 게 아닌지 적잖이 염려가 되어, 휴직 전 저장해 두었던 업무 관련 아티클이라도 조금씩 읽고 있다. 


아기를 보면서 중간중간 회사에서 오는 인사담당자와 부동산 등의 연락을 받고, 현관문을 열고 택배를 들여와서 뜯고, 고객센터에 문의를 하는 등 자잘한 일처리조차 정말 쉽지가 않다. 첫째 아기라 잠시라도 누가 옆에 없으면 애타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아기가 잠들거나 잠시 혼자 노는 짤막한 틈새 시간에 내 생리현상도 해결하고 밥도 먹고 살림도 하고 아기 용품들도 계속 열탕을 해서 가져다주고 등등 자잘한 일들을 처리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 일들은 젖병과 쪽쪽이 등 육아용품의 개수가 유한하고 내 몸뚱이는 하나이기 때문에 예고도 없고 두서도 없는 데다, 응가 치우는 일처럼 조금만 늦어지면 아기 피부가 상하거나, 또 응가 치우느라 트림을 깜빡하고 아안 시키면 토를 하는 등 대부분 마감기한이 한 시간을 넘기지 않기 때문에 '몇 시에 뭘 해야지' 하는 간단한 계획도 지키기가 어렵다. 아기를 안고 어르고 달래고 하는 건 생전 해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육체노동을 요하기도 하고. 긴 흐름을 가지고 해야 하는 생각들은 중간중간 필름 끊기듯 뚝뚝 끊겨서 언제 그 생각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기 일쑤다. 아기가 언제 잘지 모르기 때문에 할 일 알람도 맞추지 않게 되고 벨소리도 무음으로 하다가 꼭 받아야 할 전화를 못 받는 일도 자주 생긴다. 


은행을 퇴사하고 이직을 했던 이유는 내 성향과 맞는 일을 좀 더 계속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1)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굴리는 장기 멀티태스킹은 잘하나 당장 앞에 손님의 업무를 처리하면서 전화로도 응대하고 메신저로 선배의 업무지시에도 응하는 것처럼 순간적 멀티태스킹은 쥐약이고 너무 싫었다. 그런 환경에서 6년간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도 정말 많이 받았지만 업무 실수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2) 단순 반복 업무들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오랜 시간 집요하고 진득하게 고민하고 산만하게 24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놓고 정리하고 리서치하며 내가 아는 지식들을 총 집합해서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내는 류의 일을 굉장히 좋아한다. 금융상품을 세일즈 하는 것도 꽤 재미는 있었지만 위의 이유로 은행 영업점에 돌아가기가 싫었고 본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어서 안정적이고 육아하기 좋은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첫 이직 후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는 업무 범위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커뮤니케이션이 훨씬 효율적이어야 해서 고생을 좀 했지만, 다시 현재의 대형 증권사에서 일을 하면서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이 조금씩 도움이 되어서 자기 만족감을 꽤나 느끼며 일을 했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진득하게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통찰력을 발휘하는 류의 일을 질리도록 할 수 있어서였다. 이상하게 퇴근을 하면 꼭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번뜩 떠올라서 핸드폰에 메모해 놓고 집에 가서 또 그 일을 자기 직전까지 물고 늘어지는 날들이 많았다. 출장을 가기도 하고 시차가 있는 현지와 일을 하다 보면 출퇴근 시간이 의미 없어지는 상황도 많았다. 그래도 그 고생들이 힘들지 않고 재밌다고 생각했던 건 계속 반복할수록 내가 제품과 함께 업그레이드되는 느낌 때문이었다. 


육아를 이제 겨우 세 달 해봤지만 아무리 해도 재미있어지지는 않는다. 내가 싫어하고 잘 못하는 단순 반복 업무들을 하루종일 순간적 멀티태스킹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은행 영업점에서 6년간 일했던 경험과 직장생활 짬밥으로 해야 될 일들을 마이크로 단위로 쪼개서 우선순위 리스트를 만들고, 그걸 어딘가에 적어놓고 짬짬이 하나씩 지워 나가는 식으로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에 할 산더미 같은 일들이 다 처리되어 있긴 하다. 


육아를 하면서 유일하게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은 아기를 보면서 요리를 해서 먹거나 살림을 그래도 어느 수준 이상으로 챙기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내가 기특하다 느껴질 때,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 아기가 하루하루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볼 때뿐이다. 남편이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할 필요가 없는 이유들이다. 배달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아기를 데리고 나가서 산책하면서 브런치라도 사 먹으며 나 자신에게 선물을 한다. 아기가 커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밀착해서 볼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특혜를 누린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다. 복직을 하면 평일에 브런치는 고사하고 온전히 아기를 돌볼 수 있는 날도 일주일에 이틀 정도로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지금 당장 핏덩이를 떼어놓고 복직을 한다고 해도 업무에 대한 감이 많이 줄어있는 상태라 상당히 위축될 것이 뻔하다. 지금의 핏덩이는 1년 후에도 2년 후에도 3년 후에도 여전히 어딘가에 두고 일을 하러 가기엔 너무 연약하고 불안정한 존재로 느껴질 것이고. 아기의 첫 돌이 지나고 복직을 하게 되면 무슨 일을 어떻게 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날지 모른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육아 일상에 직장을 끼워 넣는 일도 쉽지 않을 거고. 


링크드인이나 리멤버 앱에 올려둔 프로필을 보고 이직 제안이 심심치 않게 오는데 아무래도 인사 담당자분들이 육아휴직 중이라는 문구를 못 보셨거나 휴직 중이니 오히려 이직을 권하기도 한다. 아기를 낳고 나니 이직 제안이 와도 일단은 안 하는 쪽으로 생각하게 되고, 만약 하게 되더라도 가깝거나 재택이 되고 워킹맘에 관대한 문화인지를 먼저 따져보게 된다. 의외로 요즘 이직 시장에 내 연차의 기획자(PM)에 대한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서 제안이 오는 것 같은데, 출산율이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고 저출산 대책으로 기업들에게 부담이 가해지는 것이 현실인지라 나처럼 애엄마가 이직을 하려고 하면 어느 회사에서 반겨줄까 싶기도 하다. 


제품 관련 공부나 비즈니스 영어 회화와 같은 하드 스킬들은 닥치면 다 하게 되겠지만, 출산 자체가 여자의 몸과 마음에 엄청난 비가역적인 변화들을 불러오는 사건이라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고 예전 같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겸허하게 비우는 일이 진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기를 처음 만난 날 병실에서 진통제를 맞고 누워서 썼던 글을 읽으며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아기 때문에 커리어를 망친다는 식의 하찮은 생각을 했을까' 하고 다시 나 자신에게 리마인드 시켜준다. 내가 제일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이 모든 변화에 대한 수용이 가능해질 것 같다. 이 사회가 일하는 엄마들에게 가혹하다는 현실은 차치하고 근본적인 것만 봐도 그렇다. 커리어의 새로운 시작점도 그곳에서부터겠지. 


무엇보다 이렇게 갑자기 변해가는 일상과 생각에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는 걸 느낀다. 남은 기간 동안 언어 능력은 점점 퇴화되어 가겠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을 기회로 전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시간이 항상 부족하니 의식적으로 묻는 말에 감정은 빼고 두괄식 단답으로 대답하는 연습도 하고, 현상을 누구나 쉽고 빠르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말로 표현하는 연습은 놓지 말아야겠다. 무엇보다 아기와 온전히 씨름하며 보낼 수 있는 소중한 하루하루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면서도 예전의 꿈 많던 자아를 아예 버리진 말아야겠다. 정신 차려 보면 복직할 날이 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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