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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Apr 27. 2024

D+150) 워킹맘이 육아의 무료함을 극복하는 방법

분명한 건, 이런 노력들을 통해 나는 오늘도 나 자신을 케어하고 일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살림도 케어하고 아기도 케어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뼘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긴 글 주의)


몸이 아프고 아기 보는 게 처음이라 육아 외의 집안일은 꿈도 못 꾸던 시절도 어느새 지나가고, 매일매일 똑같고 단순한 일을 반복하다 보니 회사를 다니던 초보 엄마는 슬슬 일상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무료함의 원인을 설명해 보자면, 똑같고 단순한 일이란, 말 못 하는 아이에게 메아리 없는 외침처럼 하루에 여덟 시간 정도를 '맘마, 쪽쪽이, 까꿍, 동물친구들' 등의 제한적인 어휘만을 사용해 가며 먹이고 / 재우고 / 안아 올리고 / 어르고 / 기저귀를 갈아주는 등의 단순한 일과 제한된 책과 장난감으로 놀아주는 걸 매일 8회 차 정도 반복하는 걸 의미한다. 물론 하루하루 아기의 개인기도 늘어나고 알 수 없는 옹알이지만 톤과 어조로 의사표시를 할 수 있게 되는 등 커 가는 모습, 나를 보고 활짝 웃어주는 모습을 보면 그 모든 고생이 싹 잊힐 정도로 행복하기는 하다. 하지만 회사를 다녔어서 그런지 몰라도 더더욱 이런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진다.


아기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공감대를 가지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나눌 수 있는 성인끼리의 대화, 특히 사회에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가 무척이나 고프다. 회사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곳이 아니라 배움터이기도 하고 약간의 자아실현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무언가를 검색해 보고, 읽어보고, 키보드를 탁탁 두들기며 업무 요청에 답변도 달고, 여기저기 업무 연락도 하고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하며, 사회에서 동등하게 일로 만난 사람들과 커피 한잔 하며 세상물정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했던 것들이 그립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부러라도 듣기 위해 노력했던, 점심 먹으며 나누던 형식적인 대화마저 그리울 정도다. 요즘은 아기가 잠들면 밀린 집안일과 육아용품 구매 등 해야 할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뉴스를 볼 새가 없어 세상물정에도 무언가 어두워진 느낌이다. 남편이 퇴근하고 나면 대화를 하고 싶은데 둘 다 녹초가 되어서 30분 정도 잠깐 어른의 대화를 하고 잠드는 게 전부다.


유독 내가 회사 다니던 엄마라서가 아니라 쭉 전업이었던 엄마들도 비교 대상이 없어서 그렇지 아기 보는 게 무료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말을 알아듣고 어느 정도 이해해 주는 성인과 보내는 시간이 아닌 온전히 케어를 받아야 하는 존재와의 시간은 너무도 천천히 가고 막막하다. 똑같은 책을 어제도 읽어주고 오늘도 읽어주는데 아기한테는 매일 새로울 정도로 단순한 것을 반복해주어야 하는 시기이다. 그런 면에서 엄마들이 이런저런 장난감을 사 모으는 것은 아기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아기를 하루 종일 놀아주어야 하는 엄마인 내가 지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것저것 사 모으게 된다.


회사를 다녔던 엄마라서 느끼는 어려움이 무엇이냐 하면 일상이 360도 변해 버린 것이다. 내가 만약 전업 주부였다면 살림을 루틴 하게 하는 일상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아기를 케어하는 루틴이 그 위에 추가된 형태여서 조금이나마 적응하기 쉬웠을 것 같다. 그런데 살림도 세탁기 건조기 돌리기와 식세기가 못해주는 배달음식 설거지를 직접 하는 정도였던 내가, 아기가 태어나고서 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넘쳐나는 어른 빨래 아기 빨래를 매일 돌리면서, 아기용품 세척과 소독을 하루 2~3회 계속하면서, 매일 침구청소기를 돌리고 가구와 가전제품에 쌓인 먼지를 닦는 등 아기의 청결과 위생을 위한 일들까지 추가로 하는 것 자체로도 엄청나게 큰 변화였다.


밖에서 돈 버는 일상이 변하지 않는 아기 아빠 입장에서는 원래 회사에서 일하던 시간에 집에서 일을 하는 것뿐인데 왜 힘든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게 처음이라 버거웠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샤워하고, 머리와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르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서, 모닝커피를 한 잔 하고 하루 종일 앉아서 업무를 보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던 나인데, 이젠 정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새'가 없다. 이래서 아기를 낳으면 부지런해진다고 하나 보다. 이상한 점은, 분명히 나는 쉴 새 없이 바쁘고 부지런해졌는데 하루하루 점점 시간이 느리게 가고 무료하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그나마 아기를 케어하는 것보다는 깊이 생각하거나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등, 하면서 즐거운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의 비중이 많았다. 그런데 육아는 샤워 혹은 웹서핑처럼 하고 싶은 일보다는 우는 아기 밥먹이기나 똥기저귀 갈기 등 해야 할 일을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무료함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실천해 봤고 효과가 있었던 방법이 몇 가지 있다. '바쁘면 무료할 틈이 없다'는 생각으로 회사에서 일할 때 썼던 스킬들을 육아와 집안일에도 일부 적용하니 조금씩 자신감이 붙고 있다.


1. 집안일을 작은 단위의 태스크로 쪼개고 우선순위 순으로 해치운다.


집안일은 끝도 없고 티도 안 난다. 나한테 있어서 이렇게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집안일이야 말로 대충 하려면 할 게 없지만 잘하려면 끝없이 할 일이 보인다. 예를 들어 잘 있던 주방 싱크대를 물청소 한다거나, 화장실 거울을 닦는다거나, 현관 바닥을 쓸고 닦는 등 할 일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집안일을 하려면 손이 빨라야 한다는 어른들 말처럼 적응이 될 때까지는 기본적인 청소와 빨래도 아기 보면서 하기에는 벅차다. 손이 빠르다는 건 타고난 성향도 있지만 반복해서 계속하다 보면 생기는 스킬이기도 하다. 은행 다닐 때 계산기로 고객 주민번호를 2초 안에 타이핑하는 연습을 수도 없이 해서 아직도 손에 익은 것처럼 어떤 일이든 숙련되면 빨라지기 마련이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빨래'라는 행위를 하는 게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그냥 시간 날 때 빨래통에 있는 옷들을 세탁기에 담고 버튼을 누르고, 다 되면 망에 있는 빨래는 빨래건조대에 널고 나머지는 건조기에 때려 넣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니 새벽에 자고 일어나서 응가를 해서 옷과 이불에 응가가 다 묻어 애벌빨래도 해야 하고, 세탁실에 가는 동안 아기가 배고프다며 울어서 빨래하기를 아예 까먹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아기를 보면서 집안일을 하려면 집안일을 작은 단위로 쪼개어서 우선순위 순으로 해치워야 한다. 누가 느긋하게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에 한 가지 일을 쭉 이어서 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빨래와 식세기를 돌리는 걸 어떻게 쪼개어서 하는지 예를 들어 보자면, (숫자는 아기 보기, 알파벳은 아기 보는 일 외의 할 일과 집안일) 아기가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가장 좋기 때문에 (1) 아기 기저귀를 갈고 (2) 아기를 장난감 옆에 두고 잠깐 놀아준 뒤 (a)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b) 내 머리를 묶고 (c) 내 세수와 가글을 하고 (d) 내 양말을 신고 (e) 내 유산균을 먹고 (3) 아기가 울면 맘마를 쥐어주고 (f) 아기가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g) 로봇청소기가 못 들어가는 아기 방의 청소기를 돌리고 (h) 아기 방에 널어둔 빨래를 걷어서 아기 노는 곳 옆에 두고 (4) 아기 트림을 시키고 잠깐 놀아주면서 (i) 빨래를 갠 뒤 (j) 아기 옷을 분류해 빨래망에 넣고 (k) 아기 옷을 세탁기 돌리고 (5) 아기가 이때쯤 응가하면 기저귀를 갈아 주고 (l) 아기가 먹은 젖병을 해체해서 (m) 식세기를 돌린다. 여기서 빠져 있는 디테일은, 기계가 자기 담당인 일을 A부터 Z까지 처리해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아기 빨래를 돌리는 것만 해도 세탁기가 애벌빨래까지 해주진 않기 때문에 전날 애벌빨래를 까먹고 안 했으면 그것부터 해서 망에 같이 넣어서 돌려야 하고, 식세기도 자기가 알아서 그릇에 묻은 음식물을 불리고 털어서 차곡차곡 담아 주지는 않기 때문에 그냥 버튼만 누르면 돌아가는 게 아니다.


우선순위가 급하고 아기가 깨어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왔다 갔다 아기를 보면서 먼저 해치운다. 아기가 잘 때만 할 수 있는 샤워, 글쓰기, 밥 먹기 등은 아기를 왔다 갔다 재우면서 입을 옷을 화장실에 가져다 놓고 글감을 머릿속으로 정하고 반찬을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등 준비를 마치고, 아기가 잠들면 그 일을 하는 식으로 쪼개어서 시간을 절약한다. 뭔가를 하려고 하면 아기가 울어서 까먹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핸드폰에 메모를 해 두고 중요한 것부터 해치운다. 콜센터 전화나 공과금 납부처럼 평일 낮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은 전날 아기가 밤잠에 들면 시간 순으로 적어 두었다가 처리한다. 회사 다닐 때 해야 할 일이 우후죽순으로 떠오르면 메모장에 순서 없이 그때그때 메모해 두고 상황에 따라 체크리스트의 우선순위를 수시로 조정했던 방식 그대로 집안일에 적용하니 그냥 생각 없이 아기를 볼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치울 수 있다.


2. 날씨에 상관없이 하루에 한 번 산책을 나간다.


맑은 날은 산책을 나가면 하늘만 구경해도 시간이 금방 간다. 하지만 비가 오면 나도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은 뒤 아기를 태우는 유모차에도 레인커버를 씌우는 등 할 일이 여러 가지로 추가되기 때문에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무료함이 엄습해 올 때마다 도장 깨기처럼 비가 와도 우비를 입고 커버를 씌워서 산책을 다녀오면 두 시간 정도는 어느새 훌쩍 지나 있었다. 갈 곳도 살 것도 딱히 없는 날에도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나 동네 마트라도 무조건 나갔다. 아기도 점점 크면서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게 되고 나도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바깥바람을 쐬면 기분 전환이 되었다. 집에만 있으면 낮에 대화할 상대가 없는데 동네에 어르신들이 많아서 오며 가며 아기를 예뻐해 주시고 말 걸어주시는 것도 좋았다. 스타벅스에 멍하니 아기를 안고서 창가에 앉아 있어도 아기와 함께하니 외롭지가 않다. 사람들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하는지도 잠깐씩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아기가 유모차에서 잠이 들면 글감도 떠올리고 생각도 정리하곤 한다.


굳이 카페를 가는 이유는 아기가 울면 맘마라도 먹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기저귀갈이대가 없는 일반 카페 가기가 두려워 수유실이 있는 교회 카페만 다녔었는데 점점 아기 패턴을 알게 되면서 용기를 내어 다이소도 가고 장도 보러 가기 시작했다. 그냥 목적지 없이 나가면 정처 없이 떠돌다 금방 들어오게 되지만 아기 데리고 혼자 브런치 먹기, 쌀국수 먹기, 당근(중고거래)하기 등등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요즘 어린 아기가 귀해서 그런지 몰라도, 감사하게도 브런치를 먹으러 가면 주문할 때 아기가 우니 사장님이 테라스에서 주문받고 서빙까지 해 주시고, 일부러 브레이크 타임 언저리에 쌀국수를 먹으러 가면 사장님이 아기 울지 말라고 먹는 동안 아기 유모차를 끌어 주시는 등 정말 많은 배려를 받았다. 이제 다음에는 문화센터도 가고, 은행이나 지하철 타고 한두 정거장 정도 이동하는 것도 시도해 볼 예정이다.


3. 이사를 간다.


아기를 낳고 나면 이사 가기가 굉장히 번거롭고 어려운데도 아기 낳고서 이사하는 경우가 많다. 아기를 낳고 나면 신혼 때와는 전혀 다른 방 구조와 가전 가구들 그리고 늘어난 짐을 수용할 공간이 추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기를 데리고 이사를 가기 위해 두 달 전부터 집 구조를 계획하고 이삿짐센터를 알아보고 가전가구 이전설치, 와이파이 설치 등 자잘한 할 일들이 많다 보니 아기돌보기+집안일+이사준비에 시간이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사를 와서도 한동안 이삿짐도 정리하고 집을 쓸고 닦느라 시간이 훌쩍 간다.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필요 없는 물건을 발견하면 당근에 판매글을 올리느라 바쁘다. 중고로 육아용품을 구매하러 이사 온 집 근처로 다니면서 주변 상권도 눈여겨보고 동네 지리를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4. 가까운 곳에 육아 동지를 만든다.


이사를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같은 아파트 동에 사는 아기 엄마 친구 사귀기였다. 요즘 무서운 세상이라지만 엘리베이터에 진심이 담긴 쪽지와 전화번호를 남겨두니 하루 만에 연락이 왔다. 아기들도 동갑이고 나와 같은 시기에 복직을 앞둔 연년생 엄마와 수다 타임을 가지니 대화 주제도 풍부하고 멀리 이동할 필요가 없어서 자주 보게 된다. 오며 가며 엘리베이터나 아파트 동 앞에서 마주치면 인사할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된다.


5. (종교가 있을 경우) 신앙 공동체 생활을 한다.


매주 일요일은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아기옷도 외출복으로 골라 입히고 산뜻한 마음으로 교회를 간다. 동네 교회 영아부에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앞에서 동물 코스튬을 입고 율동하면서 동요 찬송도 불러 주시고 설교도 인형극으로 되어 있어서 아기를 눕혀 놓으면 한 시간 동안 집중해서 쳐다보기도 하고 선생님들도 번갈아가면서 예뻐해 주시고 안아 주셔서 시간이 금방 간다. 다른 아기들이 와서 예뻐해 주기도 하고 엄마들끼리 매주 보기 때문에 교류도 활발하다. 날씨 좋은 날 교회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 딸도 곧 저렇게 언니오빠들과 같이 뛰어놀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6.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다.


산율이 최저라고 하는데 요즘 내 친구들과 동생들의 임신 소식이 자주 들린다. 나보다 먼저 아기를 낳은 친구들은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놀러 온다. 친구들과 맛난 점심도 먹고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된다. 혼자서 외롭게 아기를 보는 것보다는 친구가 와서 새로운 시선으로 예뻐해 주고 가니 아기도 낯을 덜 가리고 나도 아기를 뭐 하고 놀아줘야 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7. 맨몸운동과 라디오 듣기 등 내가 하고 싶은 일 중에 아기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아기를 하루 종일 보는 건 맞지만 하루 종일 아기와 붙어서 놀아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어머님이 해주셨던 말씀 중에 '아기는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거'라는 말이 와닿았었는데 아기도 나와 같이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커가는 거지 어린이집처럼 너무 매 순간 놀아주려고 하는 건 나도 힘들고 아기한테도 별로 좋은 건 아니다. 그래서 빨래를 개는 것처럼 아기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기한테 말도 걸고 보여주면서 그냥 한다. 대부분 해야 할 일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스쿼트나 플랭크 같은 맨몸운동이나 영국 라디오를 틀어놓고 브릿팝을 따라 부르는 것과 같은 일들도 짬짬이 하는 편이다. 운동을 하면서 오버해서 개수를 큰 소리로 세며 아기와 까꿍 놀이를 하기도 하고 좋은 노래는 아기와 눈 맞추면서 불러주기도 한다. 내가 즐길 수 있어야 아기도 즐겁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다.


8. 회사에서 하던 일을 활용한 소일거리를 찾는다.


육아휴직 중에도 놓지 않는 건 링크드인을 통한 제안이나 메시지에 꼼꼼하게 답을 하는 것과 커피챗이다. 링크드인으로 채용 제안도 꽤 많이 오고 어떤 분은 내 이력을 보고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는데 돈 받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성심껏 답하는 편이다. 두 번째 회사를 나왔을 때에 링크드인의 느슨한 연결고리를 통해 잡 오퍼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작은 요청이나 문의도 지나치지 않고 몰아서 답변을 해 둔다. 어떨 때는 육아 잘하고 나중에 꼭 보자고 하는 분도 있다. 이직 의사가 없더라도 이런 제안이나 피드백을 받으면 복직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고 내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게 해 준다.


커피챗의 경우에도 사회초년생인 여성 분들이 신청하면 임신출산육아와 관련해서 라이프 플래닝 하는 것에 대해서도 멘토링을 해 드리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다. 나는 첫 회사를 빨리 돈 벌기 위해 연봉이 높은 금융권 중에서 제일 먼저 합격한 곳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다음 회사로 옮길 때 고생을 많이 했다.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회사를 선택할 때에도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그냥 첫 회사를 합격하는 곳으로 선택하지만 커리어 전체적으로 첫 회사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내가 겪은 일들이 나에게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처음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몹시나 뿌듯하고 지속하고 싶다.


9. 글을 쓴다.


브런치에 연재를 하고부터 멍하니 수유를 하거나 아기를 오랫동안 안아 재울 때 생각할 거리가 생겨 좋았다. 글감이 떠오르면 머릿속으로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다가 아기를 다 먹이거나 재우고 나면 부리나케 달려가 메모해 두곤 한다. 그 글감들을 가지고 써 내려가다 보면 하나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해서 마치 장을 봐놨다가 재료에 맞춰서 요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뿐만 아니라 육퇴 후 글 쓰는 일은 평범한 육아 일상을 특별하고 소중한 날로 느껴지게 한다.


10. 요리를 한다.


모유수유를 할 때 아기 아토피에 영향이 갈까 걱정되어 소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요리를 다양하게 했었다. 다진 소고기와 양념장을 만들어 놓고 나물반찬을 사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강황 가루를 직접 사서 소고기 카레도 만들었다. 매실액을 넣고 메추리알 장조림도 만들고 샤브샤브 재료를 사서 다 털어 넣고 끓이기도 했었다. 요리를 잘 못하던 나였는데 육아가 하도 지루하다 보니 요리가 재미있을 지경이었다. 틈틈이 요리 재료를 손질하고 양념장을 만들어 놓은 뒤 하루에 한 번 어부바를 하는 10분 동안 끓이고 삶고 설거지를 했다. 그 시간만큼은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배달음식이 아닌 것을 먹으니 스스로가 더 소중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배달음식을 거의 안 먹으니 다이어트가 자동으로 된 건 물론이고 다음날 무엇을 해 먹을지 고민하는 동안 무료함은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있었다.


11. 복직을 대비한 루틴을 만든다.


임신 후 찾아왔던 극심한 두통의 원인이 카페인인 것을 알고서 충격을 받았었다. 회사 다니면서 하루 한두 잔 정도는 기본으로 마셨었는데 임신을 하면서 갑자기 끊으니 금단현상이 나타난 거였다. 두통약보다는 디카페인 커피에 들어있는 미량의 카페인이 낫겠지 싶어 마셨더니 거짓말처럼 싹 나았다. 그렇게 어렵게 끊은 카페인이라 아기를 낳고 아무리 피곤해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아기가 밤에 가려워서 깰뿐더러 낮에 깨어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이유식 준비 등 할 일도 점점 많아지니 밤잠을 여섯 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다. 복직 후에는 이것보다 더 피곤할 거라고 생각하니 까마득해졌다. 마침 남편이 선물 받은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한 잔을 마셨더니 하루 종일 병든 닭처럼 졸던 증상이 싹 없어져서 그날 부로 커피를 매일 졸리지 않을 때까지 그냥 마신다.


복직하면 밤에 아기가 잠들면 샤워를 하고, 어린이집 가방을 싸 두고, 새벽에 아기와 같이 일어나서, 아기 빨래를 돌리고, 화장을 하고,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등원을 시키고, 1시간 반 거리의 회사로 출근해서, 점심에는 헬스를 하고,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또 1시간 반 동안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자마자 아기를 씻기고, 아기를 재워야겠지. 아침에 상쾌하게 머리를 감고 향수를 뿌리고 하는 사치는 누릴 수 없겠지. 지금처럼 평일에 짬짬이 어른 빨래도 돌리고 가전가구에 쌓인 먼지도 닦고 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그러니 집안일 리스트도 만들어서 위임할 수 있는 건 이모님께 맡기고, 하원도우미 선생님도 구하고, 나도 자정에 자서 새벽에 일어나는 루틴에 익숙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직을 염두에 두고 생활 패턴을 맞추려고 노력하다 보니 도와주는 사람 없이도 글쓰기나 멘토링 등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복직하면 아기와 주말밖에 못 본다는 생각에 지금의 단순하고 무료한 일상이 애틋해진다.


12. 집을 정리하고 청소하고 필요 없는 물건을 당근 한다.


이사를 오면서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한번 쭉 점검할 기회가 생겼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결혼식에서나 입을법한 원피스도 많이 사고 뾰족뾰족 하이힐도 여러 켤레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여러 벌이 필요 없어졌다. 정리와 청소를 계속하다 보니 비워야 할 물건들이 보이고 철 지난 육아용품과 함께 중고 판매글을 올리느라 분주해졌다. 아기 전용 수납장을 살 필요 없이 새로 생긴 수납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중고 판매 대금으로 다시 필요한 육아 용품을 사면서 뿌듯한 건 덤이다.


13. 시댁이나 친정을 방문한다.


나는 찾아갈 친정은 없지만 감사하게도 좋은 시댁을 만났다. 아기 데리고 세 달이나 아침밥을 얻어먹으며 시댁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좋은 시댁 어른들 덕분이었다. 혹시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시댁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 자주 전화 드리고 가서 차도 한 잔 하고 아기도 보여드리고 오는데 다녀올 때마다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이 세상에서 아기 자랑하러 갈 수 있는 집은 시댁밖에 없으니까. 조금만 있다가 간다고 해도 더 있다 가라고, 밥도 먹고 가라고, 아기도 한참을 예뻐해 주신다. 육아휴직을 쓰면 팀장님들이 복직 가능한지 떠보기 위해 아기를 대신 봐줄 친정이나 시댁이 있는지 물어본다는데, 꼭 그런 개념이 아니더라도 어른들과 아기를 중심으로 교류를 자주 하고 지내는 일상이 정말 좋다. 어른들은 손주를 바라보실 때 한없이 촉촉한 눈이 되신다. 잘 계시는지 자주 찾아뵙고 인사드리니 친정 있는 사람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고 좋다. 다녀오면 남편 물건들이나 먹을 것을 주렁주렁 받아 오기도 하고 하루 반절이 훅 지나가니 그것 또한 좋다.


14. 아기를 예쁘게 꾸며 주고 아기의 귀여움을 만끽한다.


육아 일상에 지치다 보면 잊기 쉬운 게 아기의 귀여움이 대부분 다 내꺼라는 사실이다. 특히나 귀여운 옷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서 입히다 보면 입히는 시간, 예뻐하는 시간, 사진 찍는 시간까지 한 시간은 금방이다. 이렇게 귀엽고 앙증맞은 시기가 유한하고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많이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아기를 예뻐하다 보면 시간이 더 잘 간다.




육아 고수님들이 이 글을 보면 피식 웃으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초짜 엄마에다 살림 초짜인 사람이 고군분투하며 얻은 팁들이 언젠가 비슷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날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분명한 건, 이런 노력들을 통해 나는 오늘도 나 자신을 케어하고 일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살림도 케어하고 아기도 케어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뼘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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