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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May 04. 2024

D+157) 내 페이스대로 육아하기

그런 날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그냥 굼벵이처럼 천천히 움직이더라도 할 일을 하나씩 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아 할 일이 이렇게나 많았네? 이제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전환되게 되어 있다. 

지금은 하루 잠을 못 자면 다음 날 아기 낮잠 잘 때 같이 자면 되고, 집안일이 밀리면 남편이 있을 때 몰아서 하면 된다. 하지만 복직을 하면 평일에 빈틈없이 돌아가야 하는 일상에 내가 혹은 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일상이 와르르 무너지게 될 게 뻔하다.

아기는 엄마의 컨디션과 상관없이 배 고프다고, 졸리다고, 놀아달라고 칭얼댄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에서 일찍 출발해서 남들이 지각 좀 하는 날에도 칼같이 출근하던 나도 아기를 키우니 매일 똑같지가 않다. 엄마도 사람인데 아기의 컨디션에만 맞춰서 육아를 하다 보면 지치게 마련이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도 아기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요령이 필요하다. 회사 다닐 땐 월화수목금 야근을 해도 주말이 있지만 육아는 주말이 없다. 오늘의 내가 미룬 일은 내일의 내가 해야 할 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 아기를 키우면서 에너지를 매일 조금씩 분배하지 않으면 병이 나기 십상이다. 단유를 하고서 찾아온 첫 생리는 뜨악할 만큼 아팠다. 내 배를 쥐어짜서 굴을 한 바가지 낳는 느낌이랄까. 배는 또 임신 20주 사이즈로 부풀어 있고. 이틀 정도 빈혈로 인해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띵한 데다 평소의 다섯 배는 더 졸리고 멍했다. 생리양이 무섭게 많아서 출산 후 썼던 기저귀를 다시 차고 다녀야 했다. 


아뿔싸, 단유만 하면 몸이 좀 편해질 거라는 내 생각이 짧았다. 여자의 몸은 이러나저러나 고통이라는 걸 왜 잊었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출산 후 시작된 요통이 동시에 나를 괴롭혔다. 앉기도 서기도 힘든데 하루에 몇십 번씩 땅바닥에 있는 우량아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가 해야 했다. 아마 남편이 나를 괴롭혔다면 진작에 한 번쯤은 짜증을 냈을 텐데 아기에게 짜증은 어불성설이었다. 나를 이해해주기는 커녕 힘든 날 유독 나에게 더 매달리고 칭얼거리는 존재. 조금만 더 나를 건드리면 아기한테 짜증을 낼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이 어린 아기를 더 좋은 컨디션으로 오래오래 보살피기 위해서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맨 처음 한 것은 '누워서 아기 보기'였다. 컨디션이 좋을 때 노래도 불러 주고 말도 많이 걸어주고 몸으로도 놀아주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이다 보니 에너지가 없거나 피곤할 때는 그냥 누워서 아기를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쓰다듬어 주는 정도만 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냐면 내가 억지로 일어나서 아기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정도로 회복될 때까지다. 어쨌든 아기는 혼자 두는 것만 아니면 엄마인 내 옆에서 안정을 찾고 즐거워한다. 그러니 제대로 놀아주거나 안아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은 접어 두고 아기를 예뻐해 주기만 해도 나는 잘했다고 스스로 격려한다. 이렇게 하면 내가 힘들다는 생각이 점점 옅어지면서 몸도 빠르게 회복되고 아기를 더 온전히 예뻐해 줄 수 있다. 


또 어떤 하루는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하루를 시작하기도 싫을 만큼 몸이 무거운 날이 있었다. 그런데 아기는 그걸 모르니 그날따라 똥을 푸지게 쌌는데 치우기가 너무너무 싫었다. 그래서 5분 정도를 눈 감고 있다가 '아,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슬로 모션으로 기어가듯이 일어나니 뭔가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한 발짝 더 용기를 내어 아기를 천천히 안아 올려 응가를 씻겼다. 응가를 씻기는 데만 20분 넘게 걸렸지만 어쨌든 씻기긴 씻겼다. 


그땐 몰랐는데 이것도 산후 우울증의 일종일 수 있을 것 같다. 무기력감, 해야 할 일만 가득한, 말 못 하는 아기와의 똑같은 하루가 또 시작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내 안에 스며들었나 보다. 그럴 땐 그냥 아기 옆에 누워서 잠깐 눈을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보는 것도 좋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 아기가 소리를 내는데 잘 있나 궁금해서라도 낑낑대며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또 그런 날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그냥 굼벵이처럼 천천히 움직이더라도 할 일을 하나씩 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아 할 일이 이렇게나 많았네? 이제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전환되게 되어 있다. 그게 잘 안 된다면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니 혼자 끙끙대지 말고 상담이나 가족의 도움을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이 쌓였는데 손발도 안 따라주고 아기를 보다 보니 머리도 잘 안 돌아가서 막막해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날도 있다. 이럴 땐 그냥 우선순위도 동선도 생각하지 않고 아기가 울면 맘마 타서 주고, 응가하면 치워주고 하는 식으로 닥치는 대로 한다. 아기를 보면서 동시에 일을 하기가 힘들 땐 잠깐 어부바를 하고 내 마음을 조바심 나게 하는 일부터 해치운다. 그러고 나면 한 일과 안 한 일이 보여서 천천히 다시 머릿속이 정리된다. 육퇴 후에도 '이거 이거 해야지' 하고 계획 다 세워 놨는데 하루가 너무 정신없었던 나머지 멍하니 책상에 앉아 한숨을 쉬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내 심신이 지쳤다는 뜻이니 유튜브나 잠깐 보고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잠을 빨리 자면 된다. 그날 못한 일이 있더라도 내 몸과 마음이 쉬고 나면 회복이 되어 다음날 아침에 더 빠른 페이스로 후다닥 처리할 수 있다. 


육아는 장기 레이스라는 육아 선배님들의 말이 괜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하루 잠을 못 자면 다음 날 아기 낮잠 잘 때 같이 자면 되고, 집안일이 밀리면 남편이 있을 때 몰아서 하면 된다. 하지만 복직을 하면 평일에 빈틈없이 돌아가야 하는 일상에 내가 혹은 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일상이 와르르 무너지게 될 게 뻔하다. 집안일은 주말에 몰아서 해야 할 거고, 평일에 종일 남의 손에 맡겨 놓았던 아기는 주말에 잠도 덜 자 가며 엄마아빠를 더 찾을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페이스를 조절하고 내 몸과 마음을 돌보는 건 나 스스로 잘 챙겨야 한다. 영양제도 잘 챙겨 먹고, 바쁘지만 틈틈이 운동도 하고, 마음이 힘들 땐 꼼꼼하게 열심히 하던 것들을 대충 내려놓고 하는 것들을 미리미리 연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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