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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May 11. 2024

D+164) 아기를 키우면서 철의 여인이 된다


이렇게 억척스러워지고, 꿋꿋하고, 수용적이고, 대담해진 내가 싫지 않다. 아니, 점점 더 좋아진다. 아가씨 적에 매장 서비스가 맘에 안 들면 클레임 걸던 시절보다 점원의 실수를 느긋이 기다려 주게 되는 지금의 푸근한 아줌마인 내가 더 좋다. 어떤 상황을 겪어도 어떤 일을 해도 애엄마 스피릿이면 못할 게 없다 싶다. 어쩌면 쑥쑥 자라고 있는 건 아기가 아니라 엄마인 나다.


아기를 키우면서 이전에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 둘 별 것 아니게 되는 게 참 신기하다. 임신을 하기 전에는 손가락 끝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나면 아프다고 몹시 엄살을 부렸었다. 버스 타고 왕복 세 시간 거리의 회사를 다니는 게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며 불평을 했었다. 임신을 하니 온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저리고 전날 밤을 꼴딱 새운 사람처럼 피곤해서 너무 놀랐다. 이런 세계가 있다니, 하는 충격이었다. 아기를 낳는 고통을 겪고 나니 웬만한 상처에는 피식 웃음이 난다. 요즘 아기 젖병 만지기 전에, 응가 씻긴 후, 볼일 본 후 등등 손을 하도 자주 씻었더니 손가락에 습진이 생겼다. 한쪽 손에는 아기 잘 때 급하게 종이를 만지다가 베인 자국이 있다. 별로 아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공포영화나 폭력적인 영화는 땀에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남편 손을 꼭 잡고 눈도 귀도 가려 가며 봤었는데 이제 웬만한 영화는 눈도 꿈쩍 안 하고 본다.


애엄마들이 왜 그리도 억척스러워지는지 알 것 같다. 아기를 데리고 외출을 할라 치면 내 옷 갈아입고, 내 물 마시고, 기저귀 가방에 분유랑 아기 쪽쪽이 등을 챙기고, 아기 옷을 입히고, 아기가 자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맘마를 주고, 내 볼일 보고 나서야 겨우겨우 나갈 수 있다. 선크림 바를 새도 없이 나가서 걷다 오면 손등은 까매지고 얼굴엔 새로운 기미가 생겨 있다. 쓰레기가 쌓여 남편 오기 전에 버릴라 치면 아기를 업고 양손에 쓰레기봉지를 쥐고 서 있는 내 모습이 처량할 정도다. 짧은 낮잠 시간 동안 밥을 먹으려면 나도 모르게 입에 밥과 반찬을 쑤셔 넣게 된다.


아기를 키우며 나도 모르게 철의 여인이 되어 가고 있다. 이제 아기 식탁의자 정도는 뚝딱 혼자서 조립한다. 이사 와서 실외기실에 방충망도 사이즈 재 가며 나 혼자 설치했다. 늘 남편에게 부탁하던 쓰레기도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그냥 아기 업고 나가서 버리고 온다. 육아는 아이를 독립시키는 여정이라는데, 오히려 내가 이제야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가는 기분이다.


이제 웬만큼 힘든 일은 힘들지 않게 느껴진다. 처음엔 아기 보면서 밥을 먹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어느새 아기를 업고 요리를 해서 먹을 만큼 적응했다. 샤워를 할 때는 항상 누군가가 아기를 봐줘야 했는데 이젠 아기 잠든 걸 확인하고 샤워를 한다. 아기를 보면서도 집안 먼지 청소나 아기 용품 설거지 등 살림을 챙기고 있다. 감기에 생리통에 요통까지 평소 같았으면 회사를 하루 쉬었을 텐데 아기를 돌봐야 하니 아파할 새도 없거니와 정신없이 가는 시간에 고통이 잊힌다. 남편이 없으면 얼마나 힘들까 상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남편이 도와주면 고마운 거고 힘쓰는 것 외에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으니 훨씬 좋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씩 헤쳐나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슈퍼 파워 우먼이 되어 있다.


진짜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했던 말이 있다. "가장 만족스러웠던 날을 생각해 보라.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쉬기만 한 날이 아니라 할 일이 태산이었는데도 결국은 그것을 모두 해낸 날이다." 아무래도 몸이 편하면 발 뻗고 푹 자기가 어렵다. 충분히 피곤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육체노동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육아와 살림을 하루 종일 힘들게 하고 나면 밤에 노곤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도 아기를 키워내며 한 단계 올라섰다는 기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하기도 하다. 자기 전에 이렇게 행복감이 충만한 하루를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늘 기도하게 된다.


육아로 인해 불면증이 오는 사람들도 있다. 잠이 많은 나는 아기가 긁느라 새벽에 깨도 너무 피곤해서 다시 잠들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아기가 자주 깨는 것 자체는 물론 힘든 일일 수 있지만, 다시 잠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렇게 깨고 나면 다음 날 피곤한데도 다시 패턴이 반복되어 만성 피로로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잠이 너무 많으니 다음 날에 무조건 보충해 줘야 하는 탓에 또 일찍 쉽게 잠들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사 온 집이 대로변에 있어 바깥에 소음이 심한데도 아기 울음소리가 아닌 소리에 웬만해서는 깨지 않는 것에도 감사하다. 이렇게 힘들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힘든 일들이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감사하다.


엄마가 되고부터 점점 더 수용적으로 변하고 대담해진다. '이건 이래야지, 저건 저래야지' 했던 일들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넘기게 된다. 아기를 데리고 집 앞 약국이나 편의점에 잠깐 나가기도 무서워했었지만 이젠 카페도 가고 지하철도 타고 식당에서 밥도 먹고 온다. 위층에서 늦은 밤 쿵쾅거려도 이전 같으면 '왜 이 시간에 쿵쾅거리는 거야' 했을 텐데 '그때 퇴근하나 보네. 집안일할 시간이 그때밖에 없나 보다. 그럴 수 있지.' 하고 만다.


이렇게 억척스러워지고, 꿋꿋하고, 수용적이고, 대담해진 내가 싫지 않다. 아니, 점점 더 좋아진다. 아가씨 적에 매장 서비스가 맘에 안 들면 클레임 걸던 시절보다 점원의 실수를 느긋이 기다려 주게 되는 지금의 푸근한 아줌마인 내가 더 좋다. 남편이 출근하면 아기를 안고 현관에 나가 웃으며 보내주고, 하루 종일 아기와 씨름하며 오매불망 남편 퇴근할 시간을 기다리다가 도어락 누르는 소리에 또 아기를 안고 달려 나가 웃으며 맞이하는 이 시간들도 좋다. 어떤 상황을 겪어도 어떤 일을 해도 애엄마 스피릿이면 못할 게 없다 싶다. 어쩌면 쑥쑥 자라고 있는 건 아기가 아니라 엄마인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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