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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May 18. 2024

D+171) 가장 고요하고 따뜻한 순간들

아기에게 나와의 시간은 어떤 순간으로 기억될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진 같은 순간들을 더 많이 만들어 줘야지, 다짐하게 된다. 너무 번잡하게 모든 순간을 말로 채우지 않으려고 한다. 햇살이 잘 드는 고요한 창가에 앉아서 말없이 잔잔한 보사노바를 듣는 순간의 따뜻한 기억 같은 걸 더 많이 만들어주고 싶다.

아기를 낳기 전에 행복이 뭘까에 대해 꽤나 깊이 있게 고민했었다. 진정으로 오래가는 행복은 희생과 배려 같은 가치를 추구함으로 인해 느낄 수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이전에는 소확행 트렌드에 나도 올라타서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곳 가고 루틴 지키면서 작고 이루기 쉬운 행복감들을 좇아 살았었다. 그런데 그런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행위를 다시 해야만 하는 데다 반복할수록 처음에 느꼈던 것보다 행복감이 줄어들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아기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다. 마음에 상처 투성이인 내가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어느새 어엿한 엄마가 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저 감격스럽기만 하다.


아기를 키우다 보니 나만 아는 작고 소중한 순간들이 생긴다.


아기가 낮잠을 자는 시간은 내 소중한 자유시간이기도 해서 아기가 깨면 어딘가 살짝 아쉽다. 그런데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기는 세상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게 엄마를 향해 햇살 같은 미소를 발사한다. 방금 전까지 '조금만 더 잤으면 좋았겠다' 하고 생각한 건 취소하고 아기를 마음껏 안아주고 예뻐해 준다. 잠이 덜 깬 아기가 내 어깨에 폭 기대어 하품을 쫘악 하고 있으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품에 안고 모유와 분유를 먹였었는데 요즘 아기가 가만히 있지 않아서 바닥에 눕혀 놓거나 식탁 의자에 앉혀 놓고 먹인다. 아기에게 젖병 손잡이를 쥐어주면 제법 잘 잡고 먹는데, 내가 옆에 오면 일부러 먹여달라는 듯이 손잡이를 탁 내려놓고 내 손을 만지작만지작, 다리 한쪽은 내 다리 위에 척하고 걸쳐 놓는다. 눈으로는 주변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탐색하고 있지만 발로는 내 다리를 툭툭 치며 장난을 친다. 양껏 먹고 나면 내 눈을 보며 알 수 없는 눈을 하고는 요상한 옹알이를 하며 젖병을 퉤 뱉는 시늉을 한다. 귀엽고 웃기다.


매일 똑같은 지루한 트림 시간, 아기가 토하지 않게 최대한 오래 해주려는데 너무 무료해서 하품을 하며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기가 내 어깨에 포옥 기댄다. 따뜻하다. 말랑하다. 아기가 졸린 듯이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나까지 나른해진다. 아기를 재우며 밤새 못 잔 잠을 쪽잠으로 보충해 본다. 달콤하다. 일어나서 다시 창 밖을 내다보는데 말도 안 되게 고요하다. 이런 순간이 내 생에 다시 주어질까? 잠시 생각하며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어느 날은 잘 시간 언저리에 놀아주다가, 아기에게 내 얼굴이 거꾸로 보이게 앉아서 그냥 웃었을 뿐인데 아기는 그게 신기하고 재밌는지 꺄르륵, 하고 웃음이 터졌다. 내가 씨익 웃으면 아기는 어디서 그렇게 예쁘게 웃는 법을 배웠는지 거울처럼 씨익 따라 웃는다.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잇몸 웃음이다. 맑고 소중한 웃음이다. 별 것도 아닌데 나도 웃음이 난다. 하루 종일 이삿짐 정리하고 살림 하면서 아기 보느라 유독 피곤한 날이었는데 힘들다는 생각이 싹 없어진다. 잠깐 동안 나도 돈 걱정이나 이유식 걱정 등등 복잡한 이것저것 생각을 멈추고 아기 옆에 털썩 엎드려 누워서 꺄르륵 웃는다. 코 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난다. 조만간 이 순간이 그리워질 것을 너무 잘 알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이전보다 하루에 열 배는 더 많이 웃는 것 같다.


아기가 코감기가 걸린 데다 이유식을 시작하며 쌀 알레르기가 올라와 밤에 온몸을 긁고, 졸려서 쪽쪽이는 물고 싶은데 코가 막혀서, 입으로 숨 쉬려고 쪽쪽이를 뱉었다가 다시 달라고 우는 일을 몇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낮에는 콧물이 줄줄 흘러도 씩씩하게 놀았는데 밤만 되면 이러니 점점 지쳐가는 중이었다. 침대에 눕혀 놓으면 잘 자던 아가인데 계속 짜증을 내니 신생아 때처럼 안고 재우며 시간이 안 가서 눈은 다른 데를 보고 있었. 아기가 잠들었나 확인차 내려다보니, 글쎄 숨도 잘 못 쉬고 간지러워서 힘들 텐데 나와 눈 마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활짝 웃어준다. 도대체 넌, 뭘 알고 웃는 거니, 하고 묻고 싶었다. 또다시 코끝이 찡해지며 나도 모르게 주륵주륵 눈물이 흐른다. 고마워. 아픈데도 웃어줘서 고마워. 벌써 안으면 품에 쏙 들어오지 않고 손발이 삐죽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아기를 꼬옥 안고 흔들흔들, 자장가를 불러 준다. 이 순간 역시 너무너무 그리워질 것이 뻔하다.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주고 있는 내가 신기하기도 하다.


아기를 돌보며 하루 종일 단순한 생각과 말과 일들을 하며, 일을 할 때 복잡한 케이스와 해결 방안들을 떠올리며 복잡한 생각들을 했던 게 그리웠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단순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일에 대한 생각은 떠오를 때마다 글에 가두어 두고 실질적으로 아기를 먹이고 재우는 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몸이 고되어 잠자리에 들 때 별 복잡한 생각 없이 곯아떨어지니 좋다. 그동안 이런저런 것들로 채워져 있던 머리를 비우고 아기와 관련된 지식들과 생각들로 다시 채워 나가는 이 시기가 소중하다. 한창 배밀이를 하는 아기와 같은 눈높이에서 엎드려서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머리를 맞대고 바보같이 웃는 그 순간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 저장해 본다.


출산 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속상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바보가 되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다. 그냥 나도 다시 아기가 되어 보는 이 기분도 나쁘지 않다. 아기와 하루 종일 부대끼다 보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나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린이집 연장반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아기 침대 창살을 붙잡고 서서, 할머니가 데리러 오실 때까지 트리 조명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조각난 사진 같은 기억들. 그런 결핍들이 지금의 꿋꿋한 나를 만들었지. 아기에게 나와의 시간은 어떤 순간으로 기억될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진 같은 순간들을 더 많이 만들어 줘야지, 다짐하게 된다. 너무 번잡하게 모든 순간을 말로 채우지 않으려고 한다. 햇살이 잘 드는 고요한 창가에 앉아서 말없이 잔잔한 보사노바를 듣는 순간의 따뜻한 기억 같은 걸 더 많이 만들어주고 싶다.


하루하루 육아에 지쳐서 이렇게 반짝이는 순간들을 그냥 지나칠 때가 많다. 손으로 공기를 쥐는 것 같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필사적으로 적어 두었다. 잊지 않기를. 그리울 때 언제든 또 꺼내어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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