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을 사용하면서 레퍼런스를 모으는 걸 멈출 수가 없다. 모아둔 레퍼런스는 시간이 날 때 쭉 훑어보면서 '복직하면 이렇게 기획해야지' 되뇐다.
휴직한 지 어언 7개월이 다 되었건만, 엊그제 일하던 것처럼 일하던 내가 그립다. 문득문득 일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 무언가를 할 수 없어 괴롭다.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당장 아기 응가를 치워야 할 때면 눈은 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아기 응가를 치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기분이 좋아진 아기를 잠시 내려놓고는 부리나케 메모를 한다. 육퇴 후 메모를 정리하면서 신문 기사도 읽고 이런저런 칼럼들도 읽으며 '복직하면 이렇게 해 봐야지' 하고 다짐하고는 한다.
출산 전에 어떤 일을 했건, 일하던 엄마가 느끼는 감정과 고민들은 비슷비슷할 거다. 일을 하던 일상이 그립고, 살림과 육아로 꽉 찬 일상이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지갑 속 명함은 내밀 곳이 없고, 일로 만난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선뜻 연락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아기가 자라면서 발사하는 미소와 새로운 모습에 힘을 내며 육아 일상에도 조금씩 적응해 가는 것 같다. 그냥 직장 다녔던 엄마의 습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들이지만 굳이 앱을 기획하던 엄마라서 놓지 못하는 습관들이 있어서 그래도 그냥 한 번 적어 봤다.
우선 앱을 사용하면서 레퍼런스를 모으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육아 앱을 사용하거나 반찬을 배달시킬 때는 팝업 혹은 서비스 회원 탈퇴를 방어하는 페이지처럼 어떤 인더스트리에도 적용이 가능한 레퍼런스가 눈에 들어온다. 생활비 통장을 정리할 때는 은행 앱에 자정 즈음에 뜨는 에러 메시지를 안내문구, 오류코드, 문의 연락처까지 넣어 잘 만들었길래 캡처해 둔다. 투자 앱에 뜨는 주식 입고 이벤트 메시지는 어떤 관점에서 마케팅을 하는 건지 생각해 보고 메모해 둔다. 모아둔 레퍼런스는 시간이 날 때 쭉 훑어보면서 '복직하면 이렇게 기획해야지' 되뇐다. 흔히들 서비스를 분석할 때 하는 역기획처럼 자세히 시간 들여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짤막하게 적어 둔 메모가 복직 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문서를 작성할 때 각을 맞추게 된다. 당근에 육아 용품 판매글을 올릴 때 반복해서 쓰는 문구는 노션에서 자주 쓰던 이모지를 활용해서 보기 좋게 들여 쓰기까지 신경 써서 작성한다. 아무래도 글이 깔끔하면 신뢰가 가는지 거래가 더 잘 되는 편이다. 심지어 시댁에 있을 때 남편과 떨어져 있으면서 이사 준비를 하면서 주고받는 카톡까지도 보고 형식으로 불렛을 달아서 보내곤 했다. 한 명은 돈을 버느라, 한 명은 육아를 하느라 바쁜 부부가 서로의 시간을 절약해 주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간략하게 요약해서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들끼리 육아 정보를 공유할 때 어느 앱에 어느 메뉴에서 신청할 수 있다던지 하는 것들을 나도 모르게 캡처한 뒤 강조 표시까지 해서 매뉴얼처럼 공유하고 설명하고 있다. 앱을 만들면 고객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던 습관이 어디 가지 않고 안 해도 되는 걸 자꾸 하게 된다. 당연히 엄마들은 고마워 하지만 나는 피곤하다.
집안일과 육아에서도 우선순위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덕트 매니저(PM) 역할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신경 썼던 게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순위를 세우는 일이었다.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부터 쳐내는 기술을 써먹는 것은 좋은데 너무 집착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커피 한 잔 먼저 할 수도 있는 건데 빨래나 아기 용품 소독과 같은 시급한 일부터 하게 되어 결국 육퇴 후 나만의 여유 시간이 줄어들게 되는 역효과가 난다. 우선순위대로 처리하면 육퇴도 빨라지고 수면 시간도 더 확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낮에 못한 것들을 몰아서 하느라 밤에 더 늦게 자게 되더라.
앱을 기획할 때 아직 발효되지 않은 정책을 앞서서 준비하거나 앱이 활성화된 이후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고려해 전체적인 개발 방향성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육아템 구매나 이유식 준비 등 한 달 뒤에 필요한 것들을 강박적으로 미리 준비하고 있다. 물론 일찍 준비하면 아기가 갑자기 시기가 되었을 때 차분하게 응할 수 있기는 하지만, 내가 준비한 방향대로 되지 않아 육아템이 쓸모없어지거나 미리 사둔 이유식 식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문화센터 역시 여름에 일찍 더워질 것을 걱정해 미리 등록해 두었는데, 연년생 엄마의 조언을 들어 보니 아기가 스스로 앉는 시기에 가는 게 좋다고 해서 또 돈을 낭비하는 기분이 들었다.
기획서를 작성하면서 논의 내용을 꼼꼼하게 문서화하는 습관이 배어 있다 보니 문서화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기 어렵다. 이유식 레시피도 그냥 이유식 책을 보면서 하고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두어도 될 텐데, 내가 필요한 양과 방법을 꼭 수첩에 목록화해서 적어 두고 만들어야 마음이 편하다. 육아 지식도 분명히 잘 정리해 둔 블로그가 많이 있는데 한 곳에 메모해서 정리해 두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 보니 더욱더 쉴 시간이 부족해진다.
앱을 운영할 때 장애가 나면 원인을 끝까지 파고들던 습관도 어디 가지 않는다. 아기의 안전, 건강, 정서에 대한 의문이 생기면 논문을 뒤져서라도 결론이 날 때까지 리서치를 하게 된다. 똑게육아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작가분은 엘리트 커리어 우먼이었는데 일을 다시 하지 않고 어쩌다가 육아 지식을 위해 해외 논문까지 찾아보고 책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아기를 키워보니 알겠다.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는 광고를 보고 장난감을 구매했건만 몇 달 뒤 미세플라스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보고 나 역시 판단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해외 논문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기 아토피에 스테로이드나 항히스타민제를 써도 듣지 않자 면역에 대한 공부를 기초부터 하기 위해 어느새 해외 아토피 관련 논문까지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남편과 육아 가치관에 대해 논쟁을 하게 될 때도 의사 선생님이 쓴 책이나 신빙성 있는 연구 자료를 기반으로 하기 위해 더욱더 리서치를 하게 된다.
아마 꼭 앱을 기획하던 엄마가 아니라도 성격상 이렇게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나의 느낌이지만 글로 정리하고 보니 전반적으로 참 피곤하게 육아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조금만 더 마음 편하고 쉴 시간도 확보하는 육아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일을 하면서 얻은 습관이나 스킬들을 더 즐겁게 육아하는 데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