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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Aug 17. 2024

D+278) 육아의 자기 효능감

육아를 해 보니 똑같은 일, 귀찮은 일, 더러운 일, 짜증 나는 일, 까다로운 일, 지루한 일을 계속 반복하는 거라 자기 효능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사회의 구성원 하나를 키워내는 일만큼 생산적인 일은 없다고 할 수가 있다. 

'자기 효능감'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이 효과적이고 능력이 있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공부 혹은 일을 하면서는 성적과 성과가 수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자기 효능감을 느끼기가 비교적 쉬웠다. 육아를 해 보니 똑같은 일, 귀찮은 일, 더러운 일, 짜증 나는 일, 까다로운 일, 지루한 일을 계속 반복하는 거라 자기 효능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사회의 구성원 하나를 키워내는 일만큼 생산적인 일은 없다고 할 수가 있다. 내가 아무리 고심해서 프로젝트 하나를 잘 마친 들, 이 숨만 깔딱깔딱 쉬던 아이를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 내어 독립시키는 일보다 더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아이를 키우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말이다. 


학교 다닐 때 전교 1등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성적표를 들고 갔을 때 반겨주는 할머니의 환한 표정과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품 안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직장에서 인정을 받으면 남편에게 달려가 이야기하며 내 가족에게 한번 더 인정받는 기쁨을 누렸다. 육아에 있어서는 뭔가 뚜렷한 성과 같은 게 없이 하루하루 잔잔히 흘러가다 보니 아기엄마가 자기 효능감을 어디서 찾을까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가 아기 낳기를 고민하고 있다면 그 결심을 하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처음 엄마가 되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그 책임감은 숨이 막히게 부담스러우면서도 (잘)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임신 전의 나는 주말에 하루 종일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넷플릭스 시리즈를 하루에 몰아서 보고 밥도 차려먹기 귀찮아 배달음식만 먹었던 게으름뱅이였다. 사실 회사를 성실히 다니는 것만으로 부지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회사는 퇴근 후와 주말이 온전히 쉼인 반면 육아는 24시간이다. 아침에 눈뜨면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나에게 달려드는 아기를 안아주고 맘마를 준비해서 먹이며 하루를 시작하고, 낮잠 시간에는 아기가 깨어 있을 때 하지 못하는 집안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못다 한 집안일을 한 뒤 돌아보면 어느새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다. 이 생활을 평일 주말 상관없이 아기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계속해야 한다. 자는 동안에도 엄마는 자유롭지 못하다. 새벽에 깬 아이를 달래서 다시 재우기를 여러 번이다. 


임신 전으로 돌아가서 이런 하루를 다 알고서도 다시 아기를 낳을 수 있냐고 하면 머뭇거릴 정도로 정말 쉽지 않은 하루다. 그 자체로 나 자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 살고 있냐'라고 묻는다면 무조건 잘 살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내 밥 한 끼 차려 먹기도 귀찮던 사람이 아기 맘마를 직접 만들어서 먹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잘 살고 있는 게 맞다. 아기만 24시간 케어해도 모자란 시간이지만 출산 전에는 1순위였던 남편도 살펴 줘야 하고 육퇴 후 잊고 있던 나 자신도 챙겨 줘야 한다. 아기가 아프면 내 아이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의사보다 더 세심한 홈케어로 아이의 건강을 책임진다. 삶의 중심이 없이 이것저것 관심을 두며 헤매던 사람이나 살아갈 이유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육아는 최고의 처방전이 될 것이다. 엄마야 말로 수많은 역할을 해내는 멀티 플레이어니까. 내가 한 시라도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거고 내 생활 자체가 가정이 유지되는 중심이 되는 거니까. 


아기 키우는 건 도장 깨기 같은 구석도 있다. 아이가 커감에 따라 새로운 태스크가 생긴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뒤집기를 하는 순간부터 아기 침대도 바꿔야 하고 배밀이를 하면 바닥에 매트를 깔고 이유식을 시작하면 이유식 용품에 조리법에 알아봐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아기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 때문에 하루하루가 똑같지 않기도 하다. 어제까지 밤에 잘 자던 녀석이 갑자기 이앓이를 해서 새벽에 엉엉 운다던지, 낮잠이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준다던지 하는 작은 이벤트들이 매일매일 터진다. 


일을 했던 사람이라면 육아의 모든 태스크를 업무처리라고 생각하면 자기 효능감이 조금 더 올라가는 것 같다. 단순 반복업무가 맞지 않는 나는 은행에서 일할 때 동전 하나까지 손으로 확인하며 시재 마감 하던 것이나 매일 같은 질문에 같은 답으로 클릭해야 하는 감사 관련 업무를 할 때를 떠올리며 아기 응가를 치우곤 한다. 엄마들은 똑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다. 아기 응가를 치워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연약한 아기 엉덩이가 짓무르게 된다. 아기 맘마를 먹일 때도 그릇을 당겨서 잘근잘근 씹거나 숟가락을 계속 낚아채서 던지는 귀여운 방해꾼에게 한 숟가락씩 입에 넣어 주는 게 정말 고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기분에 지칠 때가 많다. 그래도 이 한 숟가락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아기가 쑥쑥 자란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의미부여를 일부러 해야 되는 것 말고, 육아에 있어서 자기 효능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순간은 바로 아기가 훌쩍 큰 걸 느낄 때다. 어제까지 엎드려만 있던 아이가 갑자기 짚고 설 때, 엄마가 우는 척을 해도 낄낄거리던 녀석이 어느새 같이 따라서 울 때 '내가 숨만 쉬던 아기를 이만큼 키워냈구나.' 하는 생각에 벅차오른다. 사실은 아기가 알아서 큰 것이고 나는 도와주기만 한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아기가 자기표현을 시작하니 기분 좋을 땐 귀여운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기도 하는데 그럴 땐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쩜 저렇게 부모를 기쁘게 할까' 하는 생각에 신에 대한 경외감마저 든다. 육아가 너무 버겁고 지쳐갈 때쯤, 어떻게 아는지 아기가 나를 보며 재롱을 부리면 눈시울이 붉어지며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도 되나 하는 뜨거운 마음이 된다. 


나의 경우에는 이맘때 아기들을 참 좋아한다. 오동통한 볼, 아무것도 모르는 맑은 눈동자, 깜찍한 앞니 두 개, 소시지 같은 팔과 다리, 살이 접히는 발목, 옥수수 모양 발가락.. 다 눈에 넣고 싶을 만큼 너무 예쁘다. 아기한테서 나는 분유 냄새도 좋고 목욕하고 나서 뽀송한 모습도 너무 사랑스럽다. 아기를 재울 때는 강아지처럼 기어 와서 팔베개를 하고 누운 아기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행복해한다. 너무 좋아서 보드라운 아기 손이나 발을 꼭 잡고 잔다. 요즘은 아기도 그걸 아는지 엄마한테 착 붙어서 한쪽 발을 들었다 놨다 하다 잠이 든다. 이 모든 게 사랑스럽고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인 걸 알아서 더 소중하고 행복하다. 아기가 훌쩍 커 버리면 이 순간이 참 그리울 것 같다. 


이제는 엄마가 가장 힘들 때 아기가 가장 예쁜 걸 알아서 더 짠하다. 돌 즈음 아기가 한창 예쁠 때 복직을 하면 회사로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일을 하던 엄마라면 더더욱 육아의 순간순간을 즐기면 좋을 것 같다. 아기와 온전히 보내는 평일을 다시 누릴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적한 쇼핑몰에 아기와 둘이 간다던지, 아기와 함께 낮잠을 잔다던지 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소중해진다. 남은 육아휴직 기간 동안 아기와 별 이유 없이 마주 앉아 헤헤 웃는 것과 같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들을 많이 남겨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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