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얻은 자유시간인데, 그토록 보고 싶던 영화 한 편을 볼 수가 없었다. 뭘 하려 해도 아기가 엄마를 찾고 있을 텐데,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에 휩싸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아기를 일찍 데려가라면 그럴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그러나 뭐라도 해야만 그 죄책감이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하필이면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우비를 쓰고 장화를 신고 아기를 등원시키고 돌아오는데 쪽쪽이를 빠트린 게 생각났다. 졸리면 긁는 아기가 쪽쪽이가 없어서 힘이 들까 봐 장대비를 뚫고 15분 거리를 돌아가서 선생님께 쪽쪽이를 건넸다. 선생님은 아기가 그다지 보채지 않아서 괜찮다고 하셨지만 아기가 보채면 선생님이 돌보기 힘들어할 게 눈에 선했다. 그러면 안 그래도 케어할 게 많은 우리 아기에게 지치고, 아기가 반에서 애물단지가 될까 봐, 겁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온몸이 다 젖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지만 엄마의 할 일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발걸음은 가벼웠다.
평소보다 늦게 집에 도착해 이것저것 정리하다 자리에 앉았다. 누적된 피로가 풀릴 듯 풀리지 않았다. 먹구름은 하늘에 꼈는데 내 뇌에 먹구름이 낀 듯 아침부터 멍하고 띵했다. 멍한 표정으로 메모를 하나씩 지워 가며 아기 빨래를 개고, 유아식 레시피 찾아보고, 유아식 할 때 쓸 에어프라이어를 꺼내어 닦고, 이유식 다음 재료 정하고, 중고로 구한 아기 동화책을 닦아서 꺼내어 놓고, 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고작 이거 하려고 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서 힘들게 하고 있나? 하는 죄책감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와 낮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빨래를 개는 쉽고 단순한 일도 뒤죽박죽, 예전 같았으면 손수건은 손수건대로 옷은 옷대로 분류해서 휘리릭 개었을 것을 여기저기 빨래를 늘어놓고 어쩔 줄 몰라했다. 빨래를 담그려고 대야에 물을 받다가 까먹어 물이 흘러넘친 것을 남편이 출근길에 발견하고 잠가 놓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우울증이 심각해진 걸 느꼈다. 건망증 또한 그에 따라 심해지고 있었다. 주방에서 쓰던 고무장갑을 베란다로 가져가서 빨래를 정리하고는 남편에게 고무장갑이 베란다에 왜 두 개나 있냐고 물었다. 또다시 바닥으로 잠수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서 이걸 해결해야 해. 또 강박이 시작되고, 조급해졌다. 어떻게 얻은 자유시간인데, 그토록 보고 싶던 영화 한 편을 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별로 대단한 게 아니었다. 갓 내린 커피를 따뜻할 때 호로록 마시는 것, 졸음이 쏟아질 때 그대로 누워 달콤한 낮잠에 빠져드는 것, 다음날 강제로 기상할 걱정 없이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것… 뭘 하려 해도 아기가 엄마를 찾고 있을 텐데,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에 휩싸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아기를 일찍 데려가라면 그럴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그러나 뭐라도 해야만 그 죄책감이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어린이집에 잘 적응하는 줄 알았던 아기는 속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피곤했는지 혼자 일찍 잠들어 버려 낮잠을 평소보다 짧게 자고 온 아기는 집에 오자마자 긁고 칭얼거리며 초저녁 무렵 늦은 낮잠에 들었다. 언제부턴가 저녁 낮잠을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저녁에 아기를 데리고 와서 너무 피곤해하고 내 시간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걸 아기도 느껴버린 걸까? 아기는 자정 즈음 깨어 엄마아빠와 신나게 놀다가 새벽에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는 잠이 모자란 지 다시 졸려했다. 어린이집에 가면 다시 낮잠 시간인 오후 한 시보다 일찍 잠들어버렸다.
아기가 풀타임으로 어린이집을 간 둘째 날, 침대에 눕혀 놓으면 혼자 잠들던 아기가 끝까지 보채고 칭얼대며 품에 안겼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며 아기를 흔들흔들 안아 재우는데, 아기가 많이 졸렸을 텐데도 엄마가 너무 그리웠다는 듯이 나의 가슴팍과 팔,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실눈을 뜨고 내가 옆에 있는지 계속 확인하다 30분이 지나서야 겨우겨우 잠이 들었다. 같이 누워 밤잠을 재울 때도 내가 아기가 잠든 줄 알고 팔베개를 빼거나 침대에서 나가려고 하면 아기는 번쩍 눈을 떠 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아기가 그런 행동을 한 게 처음이었다. 이런 아기의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눈물이 줄줄 흘렀다.
‘엄마가 나를 떠날 때, 나도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엄마의 온기가 많이 부족하고, 엄마가 많이 그리웠겠구나.’ 하지만 아가야, 엄마는 널 떠나지 않을 거란다. 선생님도 또 다른 엄마라고 생각하고 엄마가 많아서 좋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아기가 잠들 때까지 꼭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마치 어릴 적의 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요즘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라는 책을 읽고 있다. 책에서 말하길, 이런 죄책감은 딸에게 또 다른 짐이 된다고 한다. 나의 내면의 아이가 결핍을 해소해야 내 딸도 건강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아기가 나를 치유하는 것은 감사하지만, 내가 커리어를 포기할 수 없고 육아와 살림을 오롯이 감당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복직을 해야 하고, 아기가 어릴 때 어린이집을 가게 되면서 나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과, 내 결핍을 아기로 인해 깨달아가는 그 과정이 아기를 지나치게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내 어깨를 또다시 무겁게 짓눌렀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과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겠어서 산후우울증 상담을 차근차근 받고 있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운동도 하고 복직 준비도 할 꿈에 부풀어 올랐었는데 한 차례 내려놓고 내 마음부터 챙기기로 결심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소중한 내 딸이 나를 강인한 엄마가 되기로 마음먹게 했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다른 그 누가 내 밑바닥을 이렇게 이를 꽉 깨물고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겨나게 할 수 있었을까? 오늘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혹시나 부족한 엄마가 될까 봐 겁이 나는 하루를 향해 한걸음 내디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