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거듭할수록 단단해지는 다정한 마음들
외할머니는 가게 일이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나와 둘째 동생을 살뜰히 돌봐주셨어요. 초등학교 때 중요한 행사는 엄마보다 외할머니가 더 많이 오시곤 했어요. 외할머니와 목욕탕도 자주 가고, 계 모임도 많이 따라갔었죠. 어린 시절이라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노래도 참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술도 좋아한 외할머니셨어요. 한 마디로 흥이 많은 분이셨죠. 술을 알 나이가 되고 나서 제일 속상하고 슬펐던 건 외할머니와 술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외할머니와는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곁에서 제일 오래오래 있어주실 줄 알았던 외할머니가 제일 먼저 돌아가실 줄이야. 외할머니가 바라던 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이 유일한 효도가 되었죠. 교복 맞추라고 서랍에 넣어 놓은 돈이 외할머니가 주신 마지막 선물이었고요.
문득문득 엄마께 이야기하곤 해요. 외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좋은 술친구가 되었을 거 같다고요. 엄마가 외할머니를 닮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엄마와는 영영 술친구가 될 수 없는 게 속상할 뿐이죠. 한 번쯤 꿈에서라도 술 한 잔 하고 싶은데 제 마음은 몰라 주시는 거 같아 좀 서운하긴 해요. 둘째 동생이 결혼할 무렵에서야 꿈에 한번 나와서 환하게 웃으셨었죠. 제가 결혼할 무렵에 꿈에서 술 한 잔 해주시려나 봐요.
그래도 사이사이 밀려오는 그리움과 헛헛함은 채울 길이 없었죠. 그러다 소집을 하면서 만나게 된 병산동 마을 어르신들이 그 마음을 헤아려주시곤 해요. 소집을 여는데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지만, 막상 마을에서 달가워하지 않았다면 용기의 불씨가 순식간에 꺼졌을 거예요. 다행히 마을회관을 찾아 처음 어르신들을 뵈었을 때 환하게 맞아주신 표정이 지금도 선명히 마음에 남아있어요. 그러면서 옥자 할머니께서 건네준 술 한 잔을 말끔히 비우니 술을 제법 한다면서 더 마음에 들어 하셨죠. 그날 이후 어르신들은 낮술 하는 자리에 종종 저를 껴주곤 하셨어요. 흥이 많은 옥자 할머니는 정말 우리 외할머니를 많이 닮으셨어요. '외할머니와 술을 마시면 이런 마음이겠구나' 싶었죠.
출근길마다 지나는 영자 할머니 집.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 "요새 통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느냐", "아버지는 잘 있느냐"며 물어봐주시곤 하는데요. 그리고 잠시 기다려보라며 부랴부랴 집 안으로 들어가 애호박, 오이소박이, 캐러멜, 사탕, 오렌지주스, 두유를 봉지에 가득 담아 건네주시곤 해요. 영자 할머니표 믹스 커피도 참 달달해요. 그런 다정한 날들을 마음에 잘 비축해 둔 덕분에 진상 손님들이 찾아와도 거뜬히 이겨내곤 했던 것 같아요. 사실 진상 손님들에게 마음 상한 날들도 많았지만 그날에만 몹시 화가 나고 오래가진 않더라고요. 그런 날들은 마음에서 쉬이 옅어지는데 다정한 날들은 꽤 오래 마음에 머물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깊어지고 단단해져요.
처음 소집 문을 열었을 때 함께 기뻐해주시고, 더 이상 집에서 안 쓴다며 소 코뚜레와 털 긁개를 건네주시던 마음도 여전히 선명해요. 동네 풍경 사진들을 보면서 누구네 집이라며 환하게 웃으시던 표정들도 선명하고요. 허기진 마음을 달래주던 떡만두국, 수확한 검정콩을 나눠주시던 마음도 그렇고요. 전시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전시 하네?' 하며 첫 관람객이 되어주는 앞집 어르신의 머물다가는 마음도 그래요. 우리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 소집에 오래 머물면 젊은 사람들이 안 들어오는 거 아니냐며 걱정이 큰 어르신들인데 저는 더 많이 찾아주지 않는 섭섭함이 클 뿐입니다. 그러니 많이 많이 놀러 와 주셨으면 해요.
얼마 전 오랜만에 소집을 찾아와 준 든든지기 이진주 님에게 '소(所)는 과연 누가 키우나요?'를 물었을 때 그러더라고요.
누구나 키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무나 키울 수는 없는. 이끌어가고자 하는 그 사람의 의지와 지역 사회에서의 관심. 여러 사람들에게 따스한 한마디 한마디. 여러 가지가 합쳐져서 같이 키워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저에겐 어르신들의 따스한 한마디, 한 마디가 소집을 해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어요. 최근에 찾은 마을회관에서도 말선물을 가득 받았어요. 소집을 한 지 4년이 넘었다고 말씀드리니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냐며 놀라워하셨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돈벌이가 되지 않아 마음 무겁다는 고민을 옥자 할머니께 털어놓으니 저에게 그러시더라고요.
돈, 돈 하지마. 돈은..돈은 내가 잡으러 가려고 안 해도 자연히 따라오더라고.
힘을 얻는 낮술 시간이었죠. 그렇게 함께 쌓아간 다정한 시간이 힘이 될 때가 많았어요. 나중에 인생에서 '그때가 제일 좋았다, 그립다'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이때가 아닐까 싶어요. 앞으로의 날들도 유한하기에 애틋하고요. 오늘도 곁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소집은 안녕합니다.
*총 3부작으로 제작되는 <소(所)는 누가 키우나> 영상 시리즈는 오랜만에 아버지 소집지기와 의기투합한 프로젝트입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 부탁드립니다. 못다 푼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와 그동안 쌓아온 소집 이야기를 함께 연재 중입니다.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소(所)는 누가 키우나 1편 - 강릉 소집갤러리 고종환, 고기은 편> 함께 공유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Ra_LUyS0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