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所)는 누가 키우나요?'라고 물었을 때, 저마다의 답변이 돌아왔어요. '이 여행이 점점 재밌어지겠구나' 예감했죠. 사실, 이 질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에 맴도는 질문이었어요.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소집이 문을 연지 얼마 안 됐을 때 진행한 첫 번째 오픈 토크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소집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어쩌다 '소집'이 되었는지,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했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소집을 키워갈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요. 공간을 함께 꾸려갈 아버지와, 공간을 디자인해 준 효선 언니, 그리고 예술로 협업 프로젝트를 한 예술가분들과 함께 했었죠. 이후에 그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자주 갖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진 않더라고요. 그러다 4년 만에 다시 이 질문을 따라가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소를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키우겠지만 그 한 사람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같이 어우러져서 키우는 것 같아요. - 민혜인 / 소집 최다 방문 관람객 & 든든지기
(*'든든지기'는 소집의 멤버십 회원을 부르는 애칭으로, 꾸준히 소집을 찾아주고, 늘 변함없이 응원을 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새 전시가 열릴 때마다 빠짐없이 와주는 고마운 든든지기 님인 민혜인 님에게 '소(所)는 누가 키우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가 그러더라고요. 소는 혼자서 키울 수는 없다고.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같이 어우러져서 키우는 것이라고요. 맞아요. 소는 정말 혼자서 키울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느낍니다.
소집은 처음부터 혼자서는 시작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3년째 활동하면서 수입은 들쭉날쭉했고, 벌이도 시원치 않았으니 모아 놓은 돈도 변변치 않았죠. 그랬으니 솔직히 공간을 할 생각도 못했고, 엄두도 못 냈어요. 설령 공간을 꿈꿨더라도 꿈으로만 머물러야 했죠.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죠. 2018년 봄과 여름은 하루하루 악몽 같은 시기였어요. 아프게 하는 것도 사람, 낫게 하는 것도 사람이더라고요. 가장 힘들 때 손을 놓아버린사람들이 있었고, 또 손을 잡아준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살아갈 힘을 냈어요.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의 <동해안 공간 기반 청년창업 지원사업> 모집 공고였어요. 사실, 그때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떠날 마음도 컸습니다. 이곳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거든요. 그 공고를 보고 생각했죠. 이곳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지원해 보자고요. 그때 공간을 구하지 못했다면, 지원사업에 떨어졌다면 아마도 저는 지금 강릉이 아닌 곳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 당시에 협업 활동을 했던 언니, 오빠가 정말 좋은 기회인 거 같다며 꼭 지원해 보면 좋겠다고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했어요. 어쩌면 그때 저는 어디에도 둘 수 없었던 마음을 여기에 잠시 기댔었던 것 같아요. 지원을 하기 위해선 우선 '유휴공간'부터 찾아야 했어요. 공간을 찾지 못한다면 지원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가장 가까이에 아버지부터 발 벗고 나서서 공간을 함께 알아봐 주셨죠. 발이 넓은 아버지는 곳곳에 연락을 해 부탁을 하기도 하셨어요.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바다가 가까웠으면 좋겠다.'
어떤 공간이든 찾는 게 급선무이면서도, 그 와중에 '저는 이랬으면 좋겠다'는 두 가지의 기준을 마음속에 잡아두었어요. 공간을 찾으러 다닐 때도 강릉 시내 쪽은 제외하고, 주로 강릉 외곽 쪽으로 돌아보았어요. 주문진을 시작으로 사천, 연곡, 송정, 초당 쪽으로 내려오며 바닷가 인근 마을들을 중심으로 찾아다녔는데요. 딱 원하는 위치에 비어있는 집들을 만나면 반갑다가도, 주인과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았죠. 가까스로 주인과 연락이 닿아도 냉랭한 반응에 아쉬움을 뒤로해야 했죠. 그렇게 열아홉 번의 허탕이 이어지면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점점 옅어졌어요. '아무래도 떠나야 하나보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으려던 찰나에 아버지께 걸려온 전화 한 통. '자신이 사는 동네에 한번 와보라'는 아버지 친구 분의 전화였어요. 그곳이 병산동 마을이었습니다.
병산동 마을 쪽은 가끔 가족과 함께 옹심이와 감자전에 막걸리를 마시러 오곤 했던 곳이었죠. 길가에 음식점들만 보았지, 뒤편에 있는 마을을 가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친구분이 알아봐 준 곳은 두 곳이었고, 차례차례 돌아보았습니다. 우선 병산동 마을의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참 좋더라고요. 내심 이 마을에서 꼭 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첫 번째 공간은 주변 풍경도 정말 아름답고, 마음에 쏙 들었는데 구옥 공간의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조건에 맞지 않아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공간을 찾아갔죠. 다음 공간도 역시나 첫 공간처럼 일부만 사용할 수 있었어요. 두 곳 다 위치는 정말 좋은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죠. 속상함이 더해지고, 비가 오는 날이라 울적함까지 더해졌죠. 그렇게 두 번째 집 툇마루에 털썩 앉아 한숨을 푹 쉬며 마당을 다시 보는데 배롱꽃이 활짝 핀 큰 나무가 보이더라고요. 어쩐지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우거진 수풀 사이로 허름한 회색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배롱나무와 수풀 사이로 보이는 이름 모를 회색 건물. 첫눈에 반한 순간이었어요.
'무슨 건물이지?'
호기심이 발동했고, '내부는 어떨까' 몹시 궁금하더라고요. 주인 어르신께 문을 열어달라 부탁해서 들어가 보니, 안 쓰는 집기류가 가득 쌓여 있는데 그 사이로 7개의 기둥이 있는 거죠. 눈길을 확 사로잡았죠. 예전에 어떤 곳이었는지 물어보니, '소가 살던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여섯 번째 기둥에 걸린 '멍에' 기구를 보는 순간, '딱 여기다' 싶었죠. 소집의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 여기 공간은 어떠냐고 물으니 '다 쓰러져 가는데, 정말 여기로 할 생각이냐며' 괜스레 걱정하셨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실제 집주인분과 상의를 해보고 싶다고 했고, 친구분께서 주인분의 연락처를 알려주셔서 주인분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곧바로 다음날 주인분을 만났고, 어떤 공간을 할지 대략적인 계획안을 정리하여 함께 설명을 드렸죠. 다행히 주인분께서 공간 사용을 허락해 주셨어요. 높은 산을 하나 넘은 순간이었습니다.
지원사업 제출일이 얼마 남지 않아 참가신청서와 사업계획서를 부랴부랴 작성하였고, 서류 통과 후, 2차 PT 면접까지 이어졌습니다. 일이 술술 풀리는 건가 싶었죠. PT날은 제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생일 때마다 어디론가 여행을 하는 저였지만, 그날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 날이었기에 여행을 포기하고 PT에 집중했었죠. 한정된 시간 내에 발표를 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은 더해갔고, 질문을 받는 시간엔 대체 무슨 대답을 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머리가 띵-했던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심사위원 중 한 분의 날카로운 질문에 마음의 상처를 제대로 입고 나왔죠. 버스 정류장까지 털털거리며 걷는데 걸려온 전화 한 통. '엄마'라고 쓰인 폰 화면.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았죠.
"발표는 끝났어?"
"응......"
"고생했어, 우리 딸"
겨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죠. 생일인데 미역국도 못 먹고 떠난 딸이 내내 마음이 쓰였던 엄마. 발표를 잘 마무리해서 밝은 목소리로 먼저 전화를 걸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속상할 뿐이었죠. 셋째 동생 은정이를 만나 저녁을 먹으며 넋두리를 잔뜩 늘어놓으니 좀 풀리더라고요.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언니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동생 덕분에 꿀꿀한 기분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 '최종 선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사업 담당자의 전화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진짜 심각한 울보였던 거 같아요. 통화를 마치고 눈물이 왈칵 또 쏟아졌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엄마, 아빠, 동생들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전했습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어서, 이 소식은 가족의 큰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거죠. 오래 가는 기쁨은 없다고 하죠. 정말 큰 산들을 넘었다고 안도했는데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오늘은 우선 고향에서공간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소집을 만나기까지 함께 힘든 시간을 걸어준 분들을 떠올려 보았어요. 가장 중요한 건 무언가를 시작하고자 하는 첫걸음이잖아요. 그 당시 저는 온전한 두 발로 걷기도 힘든 시기였어요. 왼발까지 갑자기 다쳐서 한 달 넘게 깁스를 하던 때였거든요. 집에서도 제 방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게 그렇게 고생스러울 수가 없었고,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게 어찌나 버겁던지. 새삼 두 발로 걷는 것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절실히 깨달았죠. 그래서 더더욱 그때 깁스를 풀고 내디뎠던 첫걸음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첫걸음을 더욱 잊을 수 없는 건 다시 이곳에서 살아갈 힘을 내보는 첫걸음이기도 했으니까요. 덕분에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때 함께 곁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정말 고맙다고 다시 한번 말하고 싶어요. 제 성정이 넉넉하지 못해 지금은 그 고마움을 직접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마음도 전합니다. 표현도 서툴고 부족함 많은 저인데, 늘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에겐 한 분 한 분 차례차례 연락을 드려 직접 감사한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