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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향여행자 Sep 04. 2023

소(所)는 누가 키우나

연재를 시작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8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30대의 팔 할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을 줄이야. 몇 달 쉬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을 예상한 아버지와 어쩌다 같이 호수 여행을 하고, 함께 책을 내고, 그렇게 3년이 흐른 후엔 공간까지 함께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만약, 아버지와 같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더라면, 힘들어도 서울에서 꾹 참고 회사를 다녔을 거예요. 그런 아버지와 4년 넘게 공간을 함께 꾸려 가고 있네요.


소집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각 방송사에서 섭외 연락이 많이 왔었어요. 외양간을 고쳐 갤러리로 만든 것도 신기해했지만, 아버지와 딸이 같이 하는 공간이라는 것이 몹시 흥미롭고 재미난 아이템이었던 거죠. 작가님들의 연락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거절을 했습니다. 한때 잠시 방송국에서 일을 한 저는 작가님들이 얼마큼 고생을 하는 지도 잘 알고 있어서 거절을 하는 마음도 참 무거웠습니다.


방송을 거절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나 저나 방송 일을 한 경험 때문이었어요. 우선 저보다 아버지가 훨씬 오래 방송국에서 근무를 하셨는데요. 20년 가까이 카메라 뒤에만 섰던 아버지는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몹시 어려워하셨어요. 저 역시 길진 않았지만, 잠시 방송 일을 하면서 카메라 뒤에 있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죠. 카메라 울렁증이 있기도 하고, 말실수를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컸습니다. 한 번 방송에 나오면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큰 지를 아는 사람들이라서 더욱 조심스러웠습니다. 5분 분량의 짧은 방송으로 한 번 출연을 하긴 했지만, 그 조차도 하고 나서 몹시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더 마음을 닫았었죠. 공간을 시작한 지 세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앞으로 어떻게 꾸려가야 하나 막막하기만 한데 어떤 목표가 있고, 앞으로 어떤 공간을 할 것이라고 당찬 포부를 말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평소에 그렇게 다정한 부녀 사이도 아닌데, 방송에서는 혹여 그렇게 비춰지지는 않을까, 왜곡되진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설령, 방송을 한다고 해도 그 모습은 모두 가짜일 텐데 하고 나서 두고두고 후회를 할 거 같더라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알잖아요. 자신을 속이면서 하는 방송은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이야기를 풀어낼 용기가 생길 때까지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가며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올 테니까요.


두 번째 이유는, 갤러리 공간인데 아버지와 제가 돋보이는 게 싫더라고요.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섭외 제안이 올 때, 전시와 작가를 소개하고 알리는 경우에만 방송을 했습니다. 소집을 한 지 4년이 흐른 지금도 처음 와보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왜 이렇게 홍보를 안 하느냐'며, '왜 이런 곳을 방송에서 못 봤지?' 하며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기도 해요. 그런 분들이 조금이나마 궁금증이 풀렸길 바랍니다.

    

얼마 전에 찾아온 관람객 한 분이 그러더라고요. 전시도 궁금했지만, 여기 공간하는 분들이 도대체 어떤 분들일까 궁금해서 오셨다고요. 소집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매일매일 올리니, 꽤 부지런한 사람인 거 같기도 하고, 올리는 내용을 보면 시크한 느낌도 있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분들일까 궁금증이 커져서 왔는데 이렇게 와서 보니 궁금증이 풀린다며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소집에 머물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가셨답니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날과 제가 근무하는 날이 다르다 보니, 아버지가 계신 날과 제가 있는 날의 소집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요. 오신 분들도 저마다 다양하게 느끼고 돌아가시더라고요. 솔직히 저보다 아버지가 계신 날 오신 분들의 만족도가 훨씬 큽니다. 소집 후기를 보면서 여실히 느끼는 점입니다. 공간을 4년을 넘게 했는데도,  지극히 'I' 성향이라서 여전히 낯선 사람이 오면 바짝 긴장을 합니다.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는 공간인데, 극복해야 하는 문제인 걸 알면서도 잘 안 되더라고요. 귀한 걸음해서 오신 분들께 불편함을 드리는 건 아닌지 죄송스러울 때가 많기도 합니다. 그와는 달리,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버지께 저런 면이 있었나' 새로운 면을 발견할 때마다 놀라기도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소집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아마도 저 혼자 공간을 시작했더라면 벌써 문을 닫아도 오래전에 닫지 않았을까 싶어요.


물론 아버지와 여전히 부딪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도 전보다는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이 유연해졌음을 느낍니다.  평소엔 무뚝뚝하지만, '소집'이 연결고리가 되고, '술'이 매개가 되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면서 '나는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구나' 느껴요. 제 나이만 생각하고 아버지를 뵙는 분들은 아버지께서 많이 젊으셔서 놀라기도 합니다. 25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아직 60대 초반이시거든요. 아버지와 갈등을 빚을 때마다, 제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것에 몹시 서운하면서도 이렇게 싸울 수 있는 것도 한편으론 아버지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서 그런 순간도 가끔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이 유한하다고 생각하면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편에서 좀 더 풀 예정이라서 오늘은 이 정도로만 풀겠습니다.  


오늘로써 소집과 함께한 지 1595일째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차곡차곡 쌓은 이야기를 풀어낼 용기가 조금 생겼습니다. 최근에 아버지와 함께 오랜만에 의기투합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용기를 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집은 소를 키웠던 공간에서 이야기를 키워가는 갤러리로 2019년 4월 24일 문을 열었는데요. 더 이상 소를 키우진 않지만, 소집은 또 다른 소(所)를 키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과연 공간은 누가 키워가고 있는 걸까요?'. 이 질문에서 <소(所)는 누가 키우나> 이야기 프로젝트는 시작됩니다. 감사하게도, 방송콘텐츠진흥재단에서 주관한 제4회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 <방방곳곡:지역이-음> 콘텐츠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이 되어,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OT 때 알게 되었는데, 15대 1의 경쟁률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공고일 기준, 구독자 수 100명 이상, 6개월 이상 채널 운영 및 영상 10회 이상 업로드를 한 조건에 충족하면 지원을 할 수 있어서 용기를 내 지원했는데, 경쟁률을 듣고 나니 뽑아주신 것에 더욱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소(所)는 누가 키우나> 시리즈는 앞으로 11월까지 총 3부작이 제작될 예정입니다. 지역에서 저와 같이 창작 활동과 더불어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예술가와 지역주민, 여행자, 문화공간 운영자들은 '과연 소(공간, 지역)는 누가 키우는가'를 주제로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해요.


내일 드디어 1부가 공개될 예정입니다.  <소(所)는 누가 키우나> 1부는 강릉 소집 갤러리 편입니다. 그동안 50번의 전시회를 연 갤러리 소집에서 함께 이야기를 쌓은 사람들의 이야기, 사진작가 아버지와 여행 작가 딸이 꾸려가는 공간의 이야기,  서울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강릉 소집 갤러리를 택해 전시를 연 사연, 갤러리를 꾸준히 찾아주는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쌓은 시간들, 아버지 소집지기와 딸 소집지기에게 잊지 못할 순간들을 담았습니다. 내일 아침, 소집이야기여행 유튜브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데 10분이라는 한정된 분량을 맞춰야 해서 줄이고 줄이느라 한동안 몇 날 며칠을 밤을 꼴딱 새우는 나날이었습니다. 힘들지만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작업이었어요. 영상으로 다 담지 못한 이야기는 이곳에 풀어내 보려 합니다. 다 풀지 못한 제작 뒷 이야기이자, 또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소집 이야기를 풀어내 볼 예정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8년, 공간을 한 지 5년에 접어들어서야 용기가 생기네요. 글을 쓰지 않는 시간도 글을 쓰는 시간이라고 말했던 선배의 말을 되뇌는 오늘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시간을 헤아리고 쓰는 밤입니다.


*'글쓰는 제 뒷모습'을 그려주신 진주 작가님의 일러스트를 오랜만에 꺼내봅니다. 감사해요, 작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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