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정통성
예부터 군주에게 ‘정통성正統性’이란 치세에 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위엄’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정통성’의 사전적 의미는 ‘통치를 받는 사람에게 권력 지배를 승인하고 허용하게 하는 논리적·심리적인 근거’로, 정통성의 확립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지배의 당위성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어요. 현대 사회의 대통령에게는 선거를 통한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민주적 정통성이 부여되었습니다.
전근대 사회에서 정통성의 부재는 군주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자칫 실권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중대한 약점이었죠. 왕위에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거나, 새 왕조를 개창할 때 실상은 찬탈이라 할지라도 구舊 왕조의 마지막 왕에게서 형식적으로라도 굳이 선양받는 모양새를 갖추는 것 등은 모두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에 의한 것이라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질서를 중시했던 조선의 군주들이 정통성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적장자들이 아무 탈 없이 왕위를 이었다면 정통성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겠으나 현실은 그렇게 쉬이 흘러갈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 역대 임금 27명 중 적장자나 적장손의 지위로 왕위에 오른 이는 불과 10명에 불과했고, 그 외 17명의 왕은 모두 조선의 성리학적 원칙 위에서 보았을 때 불완전한 계승이었습니다.
조선의 불운한 임금을 대표하는 인물 단종端宗(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1455)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단종이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문종文宗(조선 제5대 왕, 재위 1450~1452)은 세종世宗(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의 적장자로 왕세자의 위치에 있었고, 단종 역시 문종의 적장자로 7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습니다. 문종 즉위 뒤엔 곧바로 왕세자에 책봉되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이상적인 계승 단계를 밟아나갔어요.
단종의 아버지 문종은 세종의 재능을 이었는지 유학·글씨·군사·천문·역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뛰어났던 것으로 전합니다. 타고난 재능에 더해 30여 년간 세자의 자리에서 아버지 세종을 보필한 데다 세자 시절부터 세종이 섭정을 시킨 탓에 국정 전반에 대한 실무능력도 일찍부터 키울 수 있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몸이 건강하지 못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아들 단종에게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문종에게는 형 못지않게 뛰어난 재능과 야심을 가진 두 동생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수양대군이 단종 즉위 1년 반 만에 자신의 심복이었던 한명회, 권람 등을 앞세워 실권을 장악하려 시도하니 이것이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입니다(1453). 이때 수양대군 세력이 명분으로 내건 것은 문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임금의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은 신하)이었던 황보인, 김종서 등의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어요. 하룻밤 사이에 황보인, 김종서 등을 비롯한 수양대군의 반대 세력이 대부분 제거되었고, 동생 안평대군 역시 즉각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사되었습니다. 권력의 비정함이 이토록 잔인했죠.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요직에 자신의 심복들을 앉혀 국정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유정난 2년 뒤에는 또 다른 동생 금성대군을 비롯한 여러 종친과 궁인 등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 보낼 것을 단종에게 요구했어요. 왕좌에만 앉지 않았을 뿐이지 모든 것을 장악한 삼촌 앞에서 단종은 그 요구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겠죠. 정세는 결국 단종이 왕위를 숙부에게 양위할 수밖에 없도록 흘러갔고, 그는 즉위한 지 3년 만에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습니다.
단종의 억울함은 일련의 상황을 지켜본 일부 신하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이는 사육신死六臣의 상왕 복위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육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자결하거나 처형당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6명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때 이들 여섯 명 외에도 70여 명의 인물이 역모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형을 받은 것으로 전하는데, 이처럼 세조에게는 정통성의 한계가 명백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단종은 결국 복위 운동의 절대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천혜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로 보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월 관아의 객사에서 끝내 죽임을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정통성을 가진 조선 왕조의 유일한 왕치고는 너무나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세조는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입니다. 어린 조카를 내쫓고 왕위를 갖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의 피를 뿌린 폭군이라는 평가와, 부친의 위업을 이어 여러 치적을 쌓은 점이 인정받아 ‘세조’라는 묘호가 붙을 만큼의 명군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 것이죠. 허술한 대의명분을 앞세워 왕위를 찬탈한 업보가 그의 사후 50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