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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監査

균형 있는 정치의 구현

by goeunpa
메인사진: 국회의사당 전경 (자료 대한민국 국회 홈페이지)


바야흐로 '국정감사 시즌'입니다. 22대 국회의 첫 정기국회가 지난 9월 2일 열린데 이어 정기국회의 꽃인 국정감사가 10월 7일~25일까지 진행될 예정입니다. ‘국정감사’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을 거예요. 국정감사란 국회가 행정부의 업무 전반, 즉 국정 전반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국감’은 입법권·예산심의권과 같이 국회의 고유 권한 중 하나로, 헌법 제61조에는 국회가 ‘국정을 감시하거나 특정한 국정사안에 대하여 조사할 수 있음’이 명시되어 있어요. 우리나라 ‘여의도’에서는 매년 가을이 시작되는 즈음에(9월 또는 10월) 국감이 이루어집니다.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 전경 (자료 대한민국 국회 홈페이지)

‘감사監査’란 건강한 조직의 유지·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장치입니다. 문명의 발달, 경제관념의 발생, ‘사유재산’ 개념의 발생에 따라 ‘감사’ 개념은 자연스레 생겨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연원은 매우 오래라 할 수 있겠죠.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주체는 자신의 책임을 ‘투명하게’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는 점차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록상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감사기관은 삼국시대 신라의 사정부司正部입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신라 제29대 왕, 재위 654~661년) 때 설치되어,*1 중앙 관청의 관리들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이후 통일신라의 국정운영체제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문무왕文武王(신라 제30대 왕, 재위 661~681) 때 사정부 밑에 지방관 감찰 담당의 외사정外司正을 신설하였고,*2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때는 왕궁 내 관원들의 풍기를 단속하는 내사정전內司正典을 설치하여 안팎으로 보다 강화된 감사제도를 운영했습니다.*3 고구려·백제의 경우 아쉽게도 전하는 관련 기록은 없으나, 신라보다 이른 시기에 체제 정비가 이뤄졌던 점 등을 미루어 나름의 감사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삼국사기』 사정부 설치 기사 (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시대 감사기관으로는 사헌대司憲臺, 어사대御史臺, 감찰사監察司, 사헌부司憲府 등이 존재했습니다. 모두 같은 기관을 이르는 것으로 성종成宗(고려 제6대 왕, 재위 981~997) 2년(983) 설치된 사헌대는 신라 때부터 존재한 감사기관의 전통과 중국 당唐·송宋의 영향을 받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조직된 것입니다. 성종 14년(995) 어사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현종(고려 제8대 왕, 재위 1009~1031) 5년(1014) 금오대金吾臺로, 그 이듬해 다시 사헌대로 명칭이 바뀌었어요. 고려 말 감찰사監察司로 다시 바뀌었고, 충렬왕忠烈王(고려 제25대 왕, 재위 1274 ~1308) 때 이르러 마지막으로 사헌부가 되었습니다.


『고려사』에 보면 어사대의 주요 기능을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해 백관의 부정과 비위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일”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4 어사대는‘감찰’이라는 주요 업무 외에도 봉박封駁*5·간쟁諫諍*6·서경권署經權*7 등의 임무가 더해져 그 기능은 매우 광범위했습니다. 따라서 어사대의 관원이 되기 위해선 학식과 인품, 출신성분 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었고, 그 지위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불체포, 면계面戒(면전에서 하는 충고) 등 여러 특권이 부여되었습니다. '깨끗한 일'을 하기 위해 그만큼 높은 수준의 기준을 정했던 거겠죠.


조선은 고려 말의 사헌부를 계승하여 건국 초부터 그 역할을 명시했으며,*8 체제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사헌부 외에도 사간원司諫院을 설치하여 간쟁은 사간원에서만 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사헌부에서도 행하는 등 두 기관의 업무는 중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사헌부의 기능 역시 간쟁, 입법논의, 서경권, 법의 집행 등 왕권 혹은 신권의 독주를 막아 균형 잡힌 이상정치를 구현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어요.

『간의등록』. 1696년(숙종 22년)~1870년(고종 7년)까지 사헌부·사간원에서 올린 상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입니다. (자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헌부의 관원들은 그 맡은 임무의 특성상 왕권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 그럴 때면 목숨을 걸고 왕의 과오를 바로잡고자 노력하다 화를 입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중종中宗(조선 제11대 왕, 재위 1506~1544) 때 대사헌大司憲(사헌부의 수장)에 오른 사림의 영수 조광조趙光祖가 있습니다. 그는 중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과격한 언행과 도학정치에 염증을 느낀 임금에게 끝내 내쳐지게 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어요.


전근대 감사기관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상정치 구현에 있어 그 역할이 매우 중요했기에 해당 기관의 관리들은 청요직淸要職으로서 남들보다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었습니다. 학식과 덕망 역시 남들이 존경할 만한 인물이어야 했죠. 대한민국의 국정을 감사하는 현 ‘여의도’의 인물들은 스스로 그 자질을 갖추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1) 『三國史記』 卷38, 雜誌7, 職官 上.

*2) 『三國史記』 卷7, 新羅本紀7, 文武王 13年(673).

*3) 『三國史記』 卷39, 雜志8, 職官 中.

*4) 『高麗史』 卷76, 志30, 百官1, 司憲府.

*5) 왕명 및 조칙이 합당하지 않음을 임금에게 글을 올려 논박하는 제도

*6) 임금의 옳지 못한 처사나 과오를 바로잡도록 간하는 일

*7) 왕권 견제 제도로 관리 임명이나 법령 제정·폐지 등에 서명하는 권리

*8) 『太祖實錄』 卷1, 太祖 1年(1392) 7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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