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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수傳奇叟

서민의 스피커

by goeunpa

볼거리가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 ‘독서’는 또 하나의 과제가 된 지 오래입니다. 여러모로 눈을 혹사하며 사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독서 트렌드로 ‘오디오북’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겠어요. 오디오북은 몇 해 전 대형 플랫폼 업체도 뛰어들 만큼 트렌드로 떠올라, 전문 성우가 아닌 유명 배우들을 섭외한 작품이 출시되기도 하는 등 이제는 꽤 익숙한 상품이 되었습니다. 오디오북을 현대판 ‘전기수’라 할 수 있겠어요.


전기수란 조선 후기에 존재했던 이색 직업으로,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이야기꾼을 말합니다. 조선 후기는 농업 생산력 증대 및 상공업 발달을 배경으로 새로운 문화가 태동한 시기였고, 서당 교육의 보급과 부를 축적한 서민 계급의 성장이 두드러짐에 따라 양반 계급에 국한되어 있던 문화의 향유가 서민층에게까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이 시기 크게 인기를 끈 것이 소설이에요. 특히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소설의 보급은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책은 서민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가의 소비재였고, 문맹률 역시 높았기에 이때 등장한 것이 이야기를 대신 읽어주는 전기수였어요. 서민들은 전기수를 통해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소설을 읽을 수 있었고(정확히는 들을 수 있었고), 글을 몰라도 ‘어르신들’(지배층)이 하던 독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수는 『삼국지』·『수호지』 등의 중국 고전부터 『임경업전』·『심청전』·『운영전』·『설인귀전』등 여러 장르의 다양한 소설을 꿰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딱딱하게 글만 읽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감정을 실어 실제 소설 속 주인공인 것처럼 혼신을 다해 연기했어요. 그러다 이야기 전개가 최고조에 다다를 때쯤 갑자기 입을 딱 닫아버렸고, 애가 탄 사람들이 앞 다투어 돈을 던지면 그제야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죠. ‘밀당’의 달인이었던 셈입니다.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중 '담배썰기'. 일하는 사람들 곁에서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가 보입니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당시 전기수의 인기는 지금의 유명 연예인 못지않았어요. 조선 후기 만능 엔터테이너라 해도 될 것입니다. 부유한 집에서는 전기수를 직접 불러들여 일정한 보수를 주고 이야기를 들었고, 그런 안정적인 자리를 구하지 못한 전기수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자리를 펴고 공연을 했습니다.


전기수의 연기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그들의 입담에 당시 청중이 얼마나 몰입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어요. 정조正祖(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 때 한창 공연 중이던 전기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종로의 한 담배 가게에서 전기수가 한창 『임경업전』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경업이 간신 김자점에 의해 목숨을 잃는 장면에 이르자, 이야기에 몰입했던 청중 한 명이 너무 분노한 나머지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어 들고 있던 낫으로 전기수를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1) 그 순간 그의 눈에는 전기수가 곧 김자점이었던 거예요. 전기수의 연기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정조실록』에 전하는 '전기수 살해사건'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

이처럼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전기수였지만, 끝내 떳떳한 직업으로 대우받지는 못한 채 사라져 갔습니다. 조선 후기 소설은 현실 세계의 반영과 서민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당연히 사회 풍자, 서민의 애환, 부패 권력에 대한 응징 등이 녹아 있었고 백성들이 이를 자유롭게 공유하는 것을 보수적 지배층이 달가워할 리 없었죠. 또한 일부 전기수들이 이야기를 핑계 삼아 양반집 안채를 드나들며 말썽까지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전기수들을 잡아들여 유배를 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시대 마지막 전기수' 충청남도 무형유산 강독사 정규헌 선생. 2023년 선생이 돌아가신 뒤 현재 보유자가 없는 상태입니다. (자료 국가유산청)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는 힘을 갖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활자가 아닌 이야기꾼을 다시 찾고 있지요. 거리가 아닌 라디오, 팟캐스트, 유튜브 등 내 손 안의 작은 기기,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이야기꾼을 만날 수 있어요. 다시금 이야기꾼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1) 『正祖實錄』 卷31, 正祖 14年(1790) 8月 10日 戊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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