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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화성

by goeunpa

정조正祖

1762년 한여름,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英祖(재위 1724~1776)는 자신의 아들(사도세자思悼世子)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습니다. 영조와 세자는 둘 사이의 갈등 골을 매우지 못한 채, 아버지의 손에 아들이 죽음을 맞는 비극적 결말을 끝내 보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도思悼’는 세자의 비참한 죽음 뒤 이를 후회한 영조가 아들에게 내린 시호였어요. 이때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당시 세손世孫(왕세자의 맏아들)이었던 정조正祖(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의 나이는 고작 11살이었습니다.

화성 융릉과 건릉 중 건릉 능침*1 (자료 국가유산청)

정조는 사도세자 사후 실질적인 왕위 계승자로서 반대 세력의 견제를 받으며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그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에 (아마도) 필사의 생존전략을 더해 훌륭히 조선의 제왕학을 습득해 나갔습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5세로 즉위한 정조는 즉위 초 반대파 제거를 일단락지은 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정책을 과감히 추진하였으며 그 개혁의 정점에 화성華城 건설이 있었고, 정조의 곁에는 정약용이 있었습니다.


정약용丁若鏞

조선 실학자 중 ‘실학의 집대성’ 하면 바로 정약용이 떠오릅니다. 정약용은 오랜 유배생활 기간 동안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김으로써 훗날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죠. 어릴 적부터 영특했던 그는 1783년 진사시進士試*2)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성균관 재학 시 정조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강진 정약용 유적 중 다산초당 (자료 국가유산청)

정조는 우수한 신진관료를 당파에 상관없이 선발하여 개혁정책추진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고, 때마침 그 시기에 28살이던 정약용이 대과大科 2등으로 벼슬길에 올라 정조의 각별한 총애 속에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정약용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정치역정이 끝나기 전까지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으며 다양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는데 그 시기의 빛나는 결과물에 화성이 있었습니다.


화성華城

현재 수원시의 랜드마크인 화성은 정조가 당시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부 화산花山으로 이장하면서 계획하고 건설한 성곽이었습니다만,*3) 화성건설의 이유가 아버지를 향한 효심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정조는 화성을 자신의 원대한 정치적 포부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심점으로 삼고자 철저한 기획하에 건설했습니다.


축성부터 가장 선진적인 기술을 이용하고자 본인이 직접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설계자에게 전달하였는데, 이를 받은 설계자가 바로 정약용이었습니다. 정약용은 『기기도설』을 참고한 뒤 거중기·녹로 등을 개발하여 화성 축성에 이용하여 성곽을 건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킴으로써 정조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수원 화성 야경 (자료 국가유산청)

정조는 화성 축조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도록 지시하여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남겼습니다. 이 책에는 거중기·녹로 등의 기계에 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축성 계획부터 제도·법식·동원인력·재료의 출처 및 용도·예산·재료 가공법·공사일지 등 화성 축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유물입니다.


수해와 같은 자연재해, 일제강점기·한국전쟁과 같은 인적재해 등을 겪으며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었음에도 현재까지도 정조 때 완공되었던 형태 거의 대부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보수, 복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화성은 1997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화성은 228년 전인 1796년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가던 10월 10일 완공됐습니다. 수원시는 2030년까지 571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228년 전의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한다는 계획을 진행 중입니다.




*1) 화성시에 위치한 ‘화성 융릉과 건릉’ 중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 씨의 무덤이고, 건릉은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 김 씨의 무덤입니다.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추숭 작업을 전개했던 정조는 죽은 뒤에도 아버지의 곁에 묻혀 생전의 그리움을 달래려 했습니다.

*2) 조선시대 과거시험 중 소과小科의 하나로, 합격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3) 이 시기 이후 줄곧 화성이라 불리던 수원은 1895년에 다시 수원군으로 불리게 되었고, 현재의 수원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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