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발생
일본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으레 들르는 곳 중 하나가 신사입니다. 신사에 들러 일본인들이 하듯 소원을 비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개중에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1처럼 그 의미를 안다면 결코 함부로 소원을 빌 수 없는 신사가 여럿 존재합니다.
구시다 신사櫛田神社는 후쿠오카의 관광 명소로 유명하지만, 이곳에 과거 일본의 만행을 오롯이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물이 보관되어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명성황후明成皇后*2 살해범 중 하나였던 토오 가츠아키藤勝顯는 범행에 사용했던 검 히젠토肥前刀를 1908년 구시다 신사에 기증했습니다. 전체 길이 120cm, 칼날만 90cm인 이 칼의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요. 당시 명성황후 살해를 계획한 일본 내부의 작전명이 ‘여우사냥’이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조선의 역사에서 국정을 주도하였던 몇 안 되는 여인 중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갖는 인물입니다. 당시 조선의 인사들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에게조차 그녀는 친정親政을 행하는 왕의 옆에서 왕보다 더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3 당대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 대원군)과 정적政敵으로써 경쟁했을 만큼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둘이 살았던 명성황후의 단출한 집안 배경은 썩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왕의 장인 혹은 처남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전횡할 법한 위험인물의 부재에 높은 점수를 주었겠죠. 흥선대원군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고종의 서장자庶長子인 완화군完和君*4을 서둘러 세자로 책봉하려 하는 등 명성황후의 발호를 철저히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의도와 달리 1873년에 이르러 그녀의 대원군 반대파 규합과 고종의 친정에 대한 열망이 더해져 10년간 이어졌던 대원군의 섭정은 결국 끝났습니다.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외세의 침략과 임오군란(1882)·갑신정변(1884) 등으로 이어지는 국내외의 위기 속에서 점진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가던 중, 조선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일본을 추방하고자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생각을 갖습니다.
명성황후의 친러적 입장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명성황후 암살계획을 수립합니다. 결국 그녀는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한복판에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하에 잠입한 낭인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을미사변). 을미사변 직후 대다수의 서양 세력은 사건의 배후를 대원군으로 짐작했어요. 실제로 일본은 자신들의 혐의를 덮고자 사건의 배후자로 대원군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죠.*5 그러나 사건 전반에 걸친 일본의 석연찮은 동태 및 대원군을 배후로 볼 수 없는 여러 정황들이 드러나며 일본에 의한 만행임이 밝혀졌습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일치되지 못하고 있어요. 비상한 정치 감각과 국제적 식견을 가지고 구한말의 어지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활로를 찾고자 노력했던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무분별한 외세 의존으로 인한 폐단과 그녀가 키운 민 씨 일족이 결국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등장한 점 등을 근거로 그녀의 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지 129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을미사변 가담자들의 후손이 개인의 신분으로 찾아와 사죄하는 일은 있었으나, 정작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인 일본 정부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히젠토’ 역시 여전히 구시다 신사에 잠들어 있습니다.
독일은 과거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인정하며 끊임없이 사죄하고 철저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제 사회의 지도적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게도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태도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아직은 요원하게만 느껴집니다.
*1) 일본의 신사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일본은 1978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A급 전범 14명을 이곳에 합사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전범자들을 국가적 전쟁 영웅으로 추앙하는 곳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과 가해국인 일본 간 외교적 문제가 되고 있어요.
*2) 조선 제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高宗(재위 1863~1907)의 왕비로, 고종의 어머니인 부대부인 민 씨府大夫人閔氏와 같은 여흥 민 씨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1897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부여되었고, 생전에는 왕후로 불리었으나 고종의 황제 즉위와 함께 황후로 추존됐습니다.
*3) 張暎淑, 2005,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 『한국근현대사연구』 35, 한국근현대사학회, 20쪽.
*4) 고종과 귀인 이 씨貴人李氏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첫 번째 아들로 이름은 선墡입니다. 대원군에 의한 완화군의 세자 책봉 시도는 명성황후의 견제로 결국 이뤄지지 못했고, 완화군은 13세에 요절했습니다.
*5) 김영수, 2009,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이화사학연구』 39, 이화사학연구소, 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