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역사나 고고학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우연한 역사적 발견’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됩니다. 그간 한국사 연구에 있어 획기로 남을만한 중요한 유물의 발견은 조사기관의 체계화된 발굴조사에 의한 것도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 그 실체가 드러난 경우도 많았어요.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주 무령왕릉’이나, 신라사 연구에 진일보를 가져온 ‘울진 봉평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포항 중성리 신라비’ 등은 모두 우연한 기회를 통해 세상에 나타나 학계를 흥분시켰습니다.
돌·금속 등에 새긴 금석문은 당대인들이 직접 제작한 1차 사료라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자료입니다. 금제 불상이나 그림에 비해 화려함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후대인들의 왜곡이나 윤색을 거치지 않아 해당 시대의 정치상·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오류를 범할 확률이 훨씬 낮죠.
그중 삼국 시대의 비석은 가뜩이나 자료가 영성零星한 고대사 연구에 단비와도 같습니다. 특히 고구려사 연구의 경우 지역 자체가 신라나 백제에 비해 접근이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전하는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더욱 그러합니다. 지금껏 발견된 고구려 비석은 중국에서 2기(광개토왕릉비, 지안 고구려비), 우리나라에서 1기 등 총 3기뿐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발견된 ‘충주 고구려비’입니다. 지역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비석은 오래전부터 마을 입구에 세워져 마을의 상징과 같은 큰 돌기둥에 불과했어요. 긴 시간 아무도 이 비석이 먼 옛날 고구려의 비석임을 알아챈 이가 없었죠. 워낙 표면의 마모가 심해 글자 확인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 년 하고도 몇 백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조용히 자신의 실체를 알아줄 이를 기다린 고구려비가 드디어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전문가들이 아닌 지역 문화재 애호가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충주 지역 문화재 애호가들의 모임인 예성동호회의 회원들은 충주 지역에도 신라의 고비古碑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어요. 충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할 뿐 아니라, 신라의 지방통치거점이었던 5소경小京 중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이었으므로, 이 지역에 신라시대의 고비가 있으리라는 짐작이 마냥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979년 2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일명 중앙탑)을 답사한 이들은, 인근 입석마을의 입석을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원들은 이 입석이 조선시대 왕이 하사한 전답(사패지)의 경계를 구분하는 ‘사패지 경계석’인 줄 알았으나,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단 조사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마을로 향했죠.
이끼와 같은 세월의 흔적이 두텁게 덮인 입석을 조사하던 회원들은 국國, 토土, 내內, 수守 등의 글자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결국 이 비가 아무 내용도 없는 백비白碑가 아니라 명문이 새겨진 비석임을 확인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비석이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약 두 달 뒤인 1979년 4월, 단국대학교의 정식조사가 진행되기 전 비문을 살펴본 전문가들은 첫머리의 ‘五月中高麗大王(오월중고려대왕)’을 ‘五月中眞興大王(오월중진흥대왕)’으로 오독하여 또 다른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인 줄 알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1 그런데 본격적으로 글자를 판독해 갈수록 비문의 내용은 조사단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 등 고구려의 관직명과 광개토왕릉비에서도 존재가 확인되는 고모루성古牟婁城 등 고구려성의 이름이 확인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진흥대왕’으로 읽었던 것이 ‘고려대왕’이었음이 밝혀졌고,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가 나타나자 학계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많은 부분에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 비가 고구려비라는 것만큼은 이견이 없습니다. 고구려의 왕을 뜻하는 ‘고려대왕’이나, 대사자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의 고구려 관등명, ‘고모루성’과 같은 고구려성의 이름, ‘동이매금東夷寐錦’, ‘신라토내新羅土內’ 같이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를 지칭하던 글자들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최대 400 여자의 글자 중 판독된 것은 200 여자에 불과하지만 이 비석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한반도 남쪽 깊숙한 곳까지 미쳤던 고구려의 영향력, 고구려의 인명 표기법 및 천하관 등을 당대인의 기록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지역문화재 동호인들의 활약으로 우리는 안개에 싸인 고구려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1) 대大자의 경우 태太로 판독하여 '태왕'이라 해석하는 연구자도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