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갑옷
2020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6월 12일부터 8월 23일까지 두 달여간 ‘말, 갑옷을 입다’ 특별전을 진행했습니다. 고대 국가의 말갑옷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특별한 자리로, 특히 ‘신라의 말갑옷’을 대표하는 황남동 109호 출토 말갑옷(1934년 출토)과 계림로 1호 출토 말갑옷(1973년 출토)은 발굴된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라 의미가 남달랐죠.
인간에게 길들여지고 개량되어 인간과 더불어 살게 된 야생동물을 가축家畜이라 부릅니다. 가축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오늘날 가축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가축화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어요. 말은 소나 개, 돼지 등과 함께 가축으로서 전 세계에 걸쳐 인간과 유구한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가장 먼저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는 개의 경우 그 시작을 1만 8000년 전부터로 보며, 말 역시 약 1만 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한 것으로 보죠.
우리 역사에서도 말은 주요 가축의 한 축으로 대우받았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5세기말까지 존속했던 나라 부여夫餘에는 사출도四出道라 부르는 지방행정구역이 존재했습니다. 사출도는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 등의 여러 가加들이 관할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 말·소·돼지·개 등 대표적인 가축이 관직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부여 사회에서 말이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에요.
전근대 사회에서 말은 이동수단의 역할 외에 전쟁 도구로써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기병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말에게도 장수가 입는 갑옷처럼 갑옷과 투구를 씌우기 시작했고,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시대와 대륙을 초월하여 제작되었어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무장 기병의 당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입니다. 황해도의 안악 3호분, 평안도의 쌍영총, 덕흥리 고분, 평양의 개마총, 중국 집안의 삼실총 등에 남아 있는 벽화에서 당대 고구려 중무장 기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림에는 갑옷으로 무장한 장수가 투구와 갑옷을 씌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요.
신라, 백제, 가야에서도 마갑馬甲(말갑옷)의 존재는 출토 유물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1934년 경주 황남동 109호분에서 최초로 발견된 이후 전국에서 신라, 백제, 가야의 말갑옷이 여러 점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2009년 경주 황오동 쪽샘지구에서 발견된 것은 길이 약 290cm, 너비 약 90cm, 무게 약 36kg의 완전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어요.
마갑의 출토가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백제 지역에서의 출토 사례는 많지 않으나, 2011년 공주 공산성에서 옻칠을 한 가죽 말갑옷이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함께 출토된 옻칠 갑옷에 중국 당唐나라의 연호인 ‘정관貞觀 19년(645)’ 명문이 확인되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으며, 무왕武王(백제 제30대 왕, 재위 600~641) 때와 의자왕義慈王(백제 제31대 왕, 재위 641~660) 때 백제가 수차례에 걸쳐 갑옷을 제작하여 당나라에 보냈던 기록과 함께 백제 갑옷 제작 기술의 우수성을 짐작하게 해주는 중요한 유물로 통합니다.
가야의 말갑옷은 ‘철의 나라’라고 불리는 명성에 걸맞게 동아시아에서 최대 수량을 자랑합니다. 마갑이 출토된 30여 곳의 고분 중 20곳이 가야 지역에 분포해요. 가야의 말 갑옷 모양은 당대의 토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경남 김해군 대동면 덕산리에서 출토된 국보 제275호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을 보면, 무장한 장수가 타고 있는 말 역시 몸 전체에 걸쳐 갑옷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요.
현재 학계에서는 고대의 말갑옷이 실제 전투용 마구류였는지, 의장용 마구류였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연구가 계속되고 있어요. 당시의 군마는 현대의 조랑말 크기로 추정되는데, 중무장한 장수와 말갑옷까지 총무게가 120~130kg에 달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기 때문이죠.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와 같은 미스터리를 나름대로 추론해 보는 것도 역사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