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eunpa Sep 20. 2024

항왜降倭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

메인: 여수 진남관.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도대첩을 그린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는 왜군倭軍이었지만 귀화 후 조선을 돕는 ‘준사’가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그는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실제 언급되는 인물로, 이순신은 그를 안골포해전 때 투항한 인물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준사의 사례와 같이 임진왜란 때 왜군으로 출정하여 조선에 투항한 왜인을 ‘항왜降倭’라 불렀습니다.*1 임진왜란 중 조선에 투항한 항왜의 숫자는 최대 1만 명에 이른 것으로 파악합니다. 침략 후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킬 만큼 파죽지세의 왜군이었지만, 초반 기세와 달리 전쟁이 장기화될 양상을 보이자 그들 내부에서도 동요가 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당시 많은 수의 항왜가 발생하게 된 배경으로는 장기 주둔으로 인한 식량 부족과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 대표되는 왜군 장수의 포악함과 과중한 노역, 조선의 항왜 우대책과 초유책, 장기화되는 전쟁에 대한 반감 등을 들 수 있습니다.*2


실제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투항한 왜인의 이름이 다수 확인됩니다. 조선은 이러한 항왜들을 적극 활용했어요. 항왜 중 조총 제조 기술과 염초 채취법 등을 아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후히 대접하여 그 기술을 전수받았고, 일부는 함경도·평안도 등의 국경 지역으로 보내 그들의 높은 전투력을 오랑캐 방어와 토벌에 활용했습니다.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초상. 성정이 포악했던 탓에 그의 진영에서 투항해 온 항왜가 유독 많았다고 합니다.

귀화 후 활동한 항왜 중에는 왕이 직접 후히 대우할 것을 명한 사례도 있었어요.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宣祖(조선 제14대 왕, 재위 1567~1608)가 항왜 여여문呂汝文을 특별히 후대하라 명하는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있습니다.


“항왜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고 전날 전교하였는데 실행하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듣건대, 이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 하는데 보통 왜인이 아니니 대우를 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3


여여문은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 때까지 종군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척후병으로 왜군의 진영을 정탐하여 승리에 공헌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다 전사했습니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원통해했으며, 우의정 이덕형李德馨은 그의 생전 공적을 일일이 나열하며 상급을 내릴 것을 주청했어요.


임진왜란 때의 항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단연코 김충선金忠善(일본명 沙也加)입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1592년 4월 13일 조선에 상륙한 후, 4월 15일 조선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효유서曉諭書를 발표하였고, 4월 20일 경상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강화서講和書를 보내 투항의사를 밝힌 뒤 휘하부대를 거느리고 귀순했습니다. 귀순 과정의 날짜를 보면 김충선은 출진 전부터 싸울 의사가 없었던 듯해요.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 김충선의 시가와 산문 엮은 시문집입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의 왜군 내 위치가 가토의 선봉장이었던 만큼 선조는 그의 귀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종2품에 해당하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제수하였고, 귀순 이듬해인 1593년에는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제수하고 조선의 성과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이때 받은 이름이 김충선으로, 사성賜姓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죠.*4


김충선은 단순히 왜군 내의 지위로만 평가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귀순 후 임진왜란(정유재란포함)에서 활약했으며 나이 예순이 넘을 때까지 전장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인조仁祖(조선 제16대 왕, 재위 1623~1649) 때 일어난 이괄의 난 진압 시에는 이괄의 수하로 무예가 뛰어나 조선군의 애를 먹인 항왜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목을 베었고, 1627년의 정묘호란, 1636년의 병자호란 시에도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조선을 위해 싸웠습니다. 병자호란 때 김충선의 나이는 무려 66세였어요. 어쩌면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왼쪽) 대구 김충선 묘, 오른쪽)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충선은 대구 달성군의 우록마을로 내려와 학문에 힘쓰다 7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문무文武를 겸비했던 인물로 전합니다. 자손들에게도 영달을 좇지 말 것과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의, 충성과 신의 등을 강조했어요. 그의 사후 우록마을의 입구에는 김충선의 뜻을 기려 세운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 이와 반대로 조선인이면서 일본에 협력하거나 항복한 이를 ‘순왜順倭’라 했습니다.

*2) 한문종, 2013, 「임진란 시기 항왜의 투항 배경과 역할」, 『인문과학연구』 36,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322~323쪽.

*3) 『宣祖實錄』 卷64, 宣祖 28年(1595) 6月 19日.

*4) 기존 김해 김씨와의 구분을 위해 임금에게 하사받은 성이라는 뜻의 ‘사성’을 앞에 붙여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부릅니다. 그가 여생을 보내고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이 대구 달성군의 우록마을이라, 우록 김씨라고도 해요.

이전 10화 고대의 마갑馬甲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