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문화는 힘들어
큰아이들은 캠핑을 가는 날이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평소보다 일찍 모인다하여 서둘러 준비해서 가고
좀 늦어서 막내와 도시락 하나만 싸서 바삐 나왔다
엘레베이터엔 개 두마리와 한 아저씨가 계셨는데
여기 개들 답지 않게 한마리가 좀 으르릉거려서
아저씨가 타라고 하시면서 줄을 당기고 계셨다
Hola! 하면서 개들을 살피며 엘레베이터를 타고
나도 모르게 문을 살짝 열어두려던 것을 잊고
끝까지 잡아당겨 버렸다
외마디 짧고 나직한 으악 소리를 들은 아저씨는
"No key? Oh..." 하시며 슬픈표정을 지었다
나와 막내는 허허 힘없이 웃으며 괜찮다고
서로를 위로했다 아직은 희망이 있었기에.
일단 학교에 아이를 데려다놓고 큰아이들의
버스가 가버린것을 확인 하니 이제 남은것은
남편의 키뿐이였다
하필 캠핑이라 버스는 속절없이 한시간 반이나
걸리는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바쁜 남편에게 오늘은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였고 몇시간을 회의를 한다는걸
잘 알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자 삼일된 냉장고 속 시금치처럼
내 마음이 시들시들 해진다
이곳은 열쇠문화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핸드폰도 열쇠도 없이 문을 살짝 열어두고
다녀오려던 계획의 끝은 이렇게 비참하구나
하지만 나는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1층 경비아저씨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해보자!하며 잠시 기대를 걸었지만 보안때문에
전화 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줄까? 하셨지만 집주인은
외국에 있어서 그곳은 시차때문에 밤이였다
성냥 하나만큼의 짧은 희망은 금새 타들어 갔다
그래서 다른 성냥을 꺼내 들었다
옆라인에 친구가 있기에 그집에 가서 핸드폰으로
남편에게 연락을 해보자
남편의 회사 동료의 집이였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집에 없는지 인터폰에도 벨에도
대응이 없었다
나와 같이 성냥 하나를 켜고 기뻐해 주셨던
경비 아저씨와 건물 청소해 주시는 아저씨는
집에 들어간걸 보았으니(바디 랭귀지로)
기다리라며 인터폰을 몇번 더 해주셨다
그 사이에 아침에 노키라고 물어보았던 아저씨가
개를 두고 외출하며 나를 보고 씁쓸하게 인사를
했다 무척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키가 없어서 못 들어가는건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오늘은 9시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오시는 날이고
10시에는 스페인어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였다
이 분들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고
이분들의 집은 각각 2시간, 1시간 거리여서
오신 다음 돌려 보낼 수도 없다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큰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대처하지 못하는
내 스스로에게 무척 실망했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왜 거기 그러고 있어요?"
슬로우로 그 친구가 말을 걸면서 내 앞에 나타났고
내가 대답도 못하고 머리위에 먹구름이 껴있었다며
상황이 다 정리된 그날 밤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현직 작가라 관찰력이 무척 대단하다
"나 전화도 열쇠도 없어"
나도 개도 무력함에 축 쳐져 있었다
나는 페루에 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장담하듯
이야기했다
한국 사람들이랑 잘 안어울리고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겠다고. 특히 회사 사람들이랑은 친분을
쌓지 않겠다고.
이 친구가 없었다면, 난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
혼자 앉아서 그저 기다렸을까
잠시 경비 아저씨께 말하고 친구와 나갔다 오니
아니나 다를까 두명의 손님이 날 맞이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사정을 설명했고
결국 남편의 회의는 몇시간 동안 계속되어 문을
따기로 했다
그나마도 경비 아저씨가 문 따는 기술자 아저씨
번호로 전화를 하고 가격을 물어보면서 세곳을
비교해 주셨다
경비아저씨가 이야기하면 아주머니는 비싸다고
했고 스페인어 선생님은 영어로 번역을 해주면서.
겨우 인사만 나누었던 나의 두 손님은
어느새 정다웁게 본인 동네의 문을 따는 가격을
나누며 판정단처럼 아저씨의 가격을 판가름했다
정신 없는 가운데 배시시 웃음이 났다
나의 실수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구나...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던 하루...
언어의 벽과 번역기 녀석의 창조 번역덕에
눈물겹던 하루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