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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그 곳

사랑의 외나무다리

by 소정

“아직 유효하오?”

“무엇이 말이오.”

“같이 하자고 했던 거, 생각이 끝났소. 합시다. 러브. 나랑, 나랑 같이.”

“좋소. 대답이 늦은 만큼 신중했길 바라오. 이제 무엇부터 하면 되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 선 남녀의 대화다. 비록 드라마지만 국경을 초월하고 신분을 넘어선 애틋함이 내면에서 고요히 흐른다. 다리 아래로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개울물이 그들의 마음을 안 듯 모른 듯 무심히 흐른다.

묵계리에서 길안천에 놓인 하리교를 건너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계곡의 물소리가 연인의 속삭임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송암계곡을 거쳐 송암폭포에 다다르니 시원하게 내뿜는 물줄기가 가슴팍의 땀까지 식혀주었다. 폭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자연 속에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만휴정이다.

만휴정 안으로 들어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외나무다리는 개울 하나 건너는 길이에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폭이다. 나보다 일찍 온 연인들이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외나무다리 위에 마주 선 남녀의 모습에서 그 자리에 섰던 드라마 속 연인이 보인다. 애틋했던 그 모습과는 다르게 달달하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 장소가 연인들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한 것 같다. 연인들도 이곳에선 드라마 속 주인공 못지않은 멋진 배우다. 얌전하게 또는 깜찍하게 그 순간을 연기하며 즐긴다. 풋풋하고 사랑스럽다. 아직 서먹한 남녀도 이 다리 위에서 마주 보고 서면 사랑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스친다.

내가 건널 차례다. 여주인공처럼 조신, 조신 걷는다. 어깨가 좁고 가냘파서 한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그녀, 그러나 건장한 사내 못지않게 당차고 용맹했던 그녀가 섰던 자리에서 멈춘다. 시대가 주는 아픔에 사랑마저 아파야 했던 그들의 삶이 진한 연민으로 자리 잡는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사랑 타령도 하는 게 아닐까. 그냥 건너기엔 아쉬워 나도 여주인공 흉내 내며 추억 한 장 찍는다. 어느새 또 다른 연인 한 쌍이 줄 서 기다리고 있다. 새로 이룰 사랑도 없는 내가 얼른 다리를 건너 만휴정 안으로 들어간다.

안동 만휴정은 조선의 문신 김계행(金係行)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앞면 세 칸·옆면 두 칸이며, 앞면 쪽 세 칸은 마루 형태로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구조이다. 양쪽 툇간에는 온돌방을 들였는데 학문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번잡하지 않고 소박해 보이나 품위가 느껴진다. 옛 정취를 오롯이 담고 있는 그곳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물소리 새소리 자연의 소리가 맑다. 불어오는 바람에 내 안의 탐욕이 모두 실려 간 듯 마음이 편안하다.

보백당 김계행은 청백(淸白)을 보물로 삼았으며, 청렴결백한 관리로도 뽑힌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연산군 폭정을 목도하고 나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고, 산속 폭포 위 이곳 만휴정에서 산수를 즐기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만휴정에 걸린 편액에 그의 청렴한 마음이 시 한 구절로 반듯하게 걸렸다.

‘吾家無寶物(오가무보물) 寶物有淸白(보물유청백)

우리 집엔 보물이 없으니, 오직 보물이 있다면 청백뿐이니라.’

청렴, 이 한 단어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산들바람이 개울물을 타고 올라와 만휴정 우물마루에 앉는다. 보백당 선생이 산들바람과 벗하며 개울 건너 자연의 벗들도 부른다. 물 흐르듯 시 한 수 흘러나오고도 남을 듯하다.

만휴정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여전히 사진 찍을 사람들이 띄엄띄엄 줄을 서 있다. 다리 위, 마주 선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별이 총총히 쏟아진다.

“통성명부터.”

“아, 나는 고가 애신이오. 귀하의 이름은 아오.”

외나무다리 위에 마주 섰던 드라마 속 두 주인공, 교차했던 감정이 한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이 가만가만 누르며 다가섰던 그 감정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 감정, 백분의 일도 찾지 못했다. 어찌 감히 그 감정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를 향한 마음이 차고 넘쳐 개울물을 타고 흘러 폭포수가 되었는걸.

나아 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다면 즐기라. 외나무다리 위에 섰든, 폭포수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섰든 함께라면 무엇이 두려우랴. 그들의 사랑이 그랬다. 사랑이냐, 조국이냐. 그녀는 조국을 택했다. 그는 그녀를 택했다. 그녀는 나라를 지키고 그는 그녀를 지켰다. 둘은 한 방향으로 걸었다. 사랑은 외나무다리를 걷듯 둘이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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