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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19. 2024

여기, 그 곳

사랑의 외나무다리

“아직 유효하오?”

“무엇이 말이오.”

“같이 하자고 했던 거, 생각이 끝났소. 합시다. 러브. 나랑, 나랑 같이.”

“좋소. 대답이 늦은 만큼 신중했길 바라오. 이제 무엇부터 하면 되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 선 남녀의 대화다. 비록 드라마지만 국경을 초월하고 신분을 넘어선 애틋함이 내면에서 고요히 흐른다. 다리 아래로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개울물이 그들의 마음을 안 듯 모른 듯 무심히 흐른다.

묵계리에서 길안천에 놓인 하리교를 건너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계곡의 물소리가 연인의 속삭임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송암계곡을 거쳐 송암폭포에 다다르니 시원하게 내뿜는 물줄기가 가슴팍의 땀까지 식혀주었다. 폭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자연 속에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만휴정이다.

만휴정 안으로 들어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외나무다리는 개울 하나 건너는 길이에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폭이다. 나보다 일찍 온 연인들이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외나무다리 위에 마주 선 남녀의 모습에서 그 자리에 섰던 드라마 속 연인이 보인다. 애틋했던 그 모습과는 다르게 달달하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 장소가 연인들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한 것 같다. 연인들도 이곳에선 드라마 속 주인공 못지않은 멋진 배우다. 얌전하게 또는 깜찍하게 그 순간을 연기하며 즐긴다. 풋풋하고 사랑스럽다. 아직 서먹한 남녀도 이 다리 위에서 마주 보고 서면 사랑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스친다. 

내가 건널 차례다. 여주인공처럼 조신, 조신 걷는다. 어깨가 좁고 가냘파서 한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그녀, 그러나 건장한 사내 못지않게 당차고 용맹했던 그녀가 섰던 자리에서 멈춘다. 시대가 주는 아픔에 사랑마저 아파야 했던 그들의 삶이 진한 연민으로 자리 잡는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사랑 타령도 하는 게 아닐까. 그냥 건너기엔 아쉬워 나도 여주인공 흉내 내며 추억 한 장 찍는다. 어느새 또 다른 연인 한 쌍이 줄 서 기다리고 있다. 새로 이룰 사랑도 없는 내가 얼른 다리를 건너 만휴정 안으로 들어간다. 

안동 만휴정은 조선의 문신 김계행(金係行)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앞면 세 칸·옆면 두 칸이며, 앞면 쪽 세 칸은 마루 형태로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구조이다. 양쪽 툇간에는 온돌방을 들였는데 학문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번잡하지 않고 소박해 보이나 품위가 느껴진다. 옛 정취를 오롯이 담고 있는 그곳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물소리 새소리 자연의 소리가 맑다. 불어오는 바람에 내 안의 탐욕이 모두 실려 간 듯 마음이 편안하다. 

보백당 김계행은 청백(淸白)을 보물로 삼았으며, 청렴결백한 관리로도 뽑힌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연산군 폭정을 목도하고 나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고, 산속 폭포 위 이곳 만휴정에서 산수를 즐기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만휴정에 걸린 편액에 그의 청렴한 마음이 시 한 구절로 반듯하게 걸렸다.     

‘吾家無寶物(오가무보물) 寶物有淸白(보물유청백)

우리 집엔 보물이 없으니, 오직 보물이 있다면 청백뿐이니라.’     

청렴, 이 한 단어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산들바람이 개울물을 타고 올라와 만휴정 우물마루에 앉는다. 보백당 선생이 산들바람과 벗하며 개울 건너 자연의 벗들도 부른다. 물 흐르듯 시 한 수 흘러나오고도 남을 듯하다.

만휴정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여전히 사진 찍을 사람들이 띄엄띄엄 줄을 서 있다. 다리 위, 마주 선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별이 총총히 쏟아진다.     

“통성명부터.”

“아, 나는 고가 애신이오. 귀하의 이름은 아오.”     

외나무다리 위에 마주 섰던 드라마 속 두 주인공, 교차했던 감정이 한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이 가만가만 누르며 다가섰던 그 감정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 감정, 백분의 일도 찾지 못했다. 어찌 감히 그 감정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를 향한 마음이 차고 넘쳐 개울물을 타고 흘러 폭포수가 되었는걸. 

나아 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다면 즐기라. 외나무다리 위에 섰든, 폭포수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섰든 함께라면 무엇이 두려우랴. 그들의 사랑이 그랬다. 사랑이냐, 조국이냐. 그녀는 조국을 택했다. 그는 그녀를 택했다. 그녀는 나라를 지키고 그는 그녀를 지켰다. 둘은 한 방향으로 걸었다. 사랑은 외나무다리를 걷듯 둘이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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