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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19. 2024

여기, 그 곳

야릇한 예언

신라의 선덕여왕은 세 가지의 예언으로 유명하다. 하나는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 둘은 적의 침략을 알고 대처했다는 것, 셋은 본인 죽음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셋 중에서 한 곳인 여근곡에 얽힌 이야기를 쫓아간다.

기이한 일이다. 한겨울에 개구리가 떼로 울어댄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나는 곳은 신라궁궐 서쪽에 자리한 영묘사의 연못, 옥문지이다. 소문을 들은 선덕여왕은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군사 이천 명을 내어주고 여근곡으로 보낸다. 아니나 다를까 알천과 필탄이 이끈 군사는 그곳에 숨어있던 백제 군사 오백여 명을 무찌른다. 그리고 뒤이어 산기슭을 타고 무섭게 달려오는 일천이백 명의 백제군을 남김없이 섬멸하고 고 돌아온다.

여근곡女根谷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에 있는 신라 때의 지명이다. 옥문玉門을 여근女根으로 해석하면 여근은 음陰이므로 남근男根이 여근 속으로 들어가면 토사 한다는 음양설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음부의 빛은 희고 흰색은 서방으로 해석되므로 서쪽에 적이 매복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근곡의 숲이 울창하다. 여근곡의 뚜렷한 형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여근곡 주차장이라 한다. 멀리 깊숙한 골짜기에 여근곡이 보인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길에 여근곡을 안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는 얘기의 본질을 생각해 본다. 큰일을 앞둔 선비의 고고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여근곡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 후 옥문지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옥문지로 가는 길에 유학사라는 사찰이 있다. 십여 년 전까지는 여근곡사로 불리다가 유학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유학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통일신라 시대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옥문지를 지키는 수호사찰이다. 다른 사찰에 비해 단청이 되어있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유학사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간다. 여근곡 골짜기에 있을 연못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한 발 한 발 디디며 옥문지가 나오길 살핀다. 작은 다리 하나가 나온다. 나무로 만들어진 짧은 다리를 건너 걸으니 옥문지 푯말이 보인다. 푯말을 먼저 읽고 돌아보니 옥문지다.

“에게! 이게 옥문지라고.”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못의 흔적이 너무 보잘것없다. 옹달샘도 아니고 웅덩이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움푹 파인 웅덩이 주변으로 돌을 쌓아서 표시해 두었는데 가느다란 호수를 통해 물이 쫄쫄쫄 흐른다. 그렇다고 물이 고인 것도 아니고 물은 흘러 이내 땅속으로 스며들고 만다. 물이 어디에서 흘러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두련다.

천년의 역사를 지켜낸 신라의 물줄기가 아닌가. 그 줄기의 맥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느 곳을 지나 이곳에 닿았는지는 중요치 않다. 천년의 세월 동안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 그 맥이 이 땅 깊숙이 흐르고 있는 것을. 눈앞으로 펼쳐진 옥문지의 광경에 다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것들에 비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플라스틱 호스를 타고 흐르는 물을 두 손으로 고이 받아 마신다. 혹여나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이 긴 세월을 타고 흘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나 보다. 물맛이 상쾌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푸르다. 깊은 산속에서 마시는 한 모금의 물맛처럼 공기 또한 신선하다.

다시 유학사를 거쳐 내려오는 길, 옥문지에 대한 실망감이 가시지 않아 자꾸만 주변을 살핀다. 마을을 사이에 둔 왼쪽으로 커다란 연못 하나가 보인다. 혹시 저곳이 한겨울에 개구리가 떼로 울었다는 그곳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최소 저 정도는 되어야 개구리가 울든 두꺼비가 싸움질하든 했을 게 아닌가 말이다.

역사의 흔적을 찾는 일은 흥미롭다. 삼국유사의 한 구절을 잡고 찾아 나설 땐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다다라보면 의외의 감탄이 나올 수도 있고, 기대치에 미치지 못해서 실망감 또한 클 수도 있다. 이번 여정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옥문지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 들려줄까?”

“응, 그게 뭔데?”

“남정네가 막대기로 옥문지를 휘저어 놓으면 아랫마을 여인네들이 바람이 난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짠데.”

믿든 말든 한바탕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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