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정 Oct 19. 2024

여기, 그 곳

쉿! 자나 깨나 말조심

이팝과 아카시아가 다투어 속살을 드러낼 무렵, 봄바람이 차일구름을 밀어낸다. 하늘이 말개지자 봄빛이 더욱 화사하다. 이팝나무, 아카시아에도 햇살이 들어 뽀얀 쌀알 같은 꽃잎이 톡톡 향기를 내뿜는다. 꿀벌들이 꽃잎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엉덩이를 한껏 추킨다. 저 봄날의 밀어(密語)가 달콤하다.

예천 지보면 대죽리로 간다. 언총(言塚) 즉 말무덤을 만나기 위해서다. 시골길을 한참 따라갔지만, 안내판이 없다. 돌고 돌아 마을 입구에 닿았을 때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 옆으로 갈라진 작은 들길로 가란다. 들길을 따라가다가 솔숲이 우거진 곳으로 방향을 튼다. 길이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다. 길옆으로 말(言)과 관련된 격언·속담이 새겨진 돌비석이 띄엄띄엄 줄지어 있다. 그것을 읽어가며 올라가니 평평한 등성이다. 

등성이 아래로 논밭이 펼쳐져 있고 마을이 길게 자리 잡았다. 마을을 등지고 돌아서니 말무덤이 보였다. 길을 건너 대여섯 칸쯤 되는 계단으로 올라섰다. 말무덤이라 표시된 둥그런 무덤 위에 풀이 자욱하게 덮였다. 이곳에 죽음의 형체도 없는 말(言)을 묻었다니, 말부터 기이했다. 

말무덤을 가운데 두고 노란 민들레가 지천이다. 민들레 꽃무리를 무심히 바라보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방시레 웃는 민들레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아니, 이 무덤이 생긴 이유를?”

“알지. 내가 이래 봬도 이곳 토박이거든.”

“한 번 들어볼까?”

“사오백 년 전이었어, 이 마을에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았거든. 그런데 사소한 말 한마디가 불씨처럼 틔더니 문중 간에 싸움이 일어난 거야. 그 싸움은 쉬이 끝나지 않았어. 그들은 얼굴만 마주치면 불을 뿜는 거야.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각각 문중 대표들이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모였어. 그런데 대표들도 자기 말만 옳다고 우기며 다른 사람들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어. 갈수록 언성이 높아지고 결국엔 또 싸움으로 이어졌지.”

“그럼 다른 문중과는 왕래를 안 하고 살면 되지 않았을까?”

“한마을에 살면서 그럴 수 없잖아. 골목만 나서면 마주치게 되는걸. 또 이웃 이야기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다 들리잖아. 안 좋은 소문은 더 빠르게 퍼지고 말이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다니니까 사람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거야. 툭 건들기만 하면 펑 터져버렸지.”

“다들 엄청 예민했나 보네.”

“어느 매미 소리 요란한 오후였어. 마을 가운데 정자에서 또다시 해결책을 논의하려 문중 대표들이 모였거든. 옥신각신 또 시끄러웠어. 그때 마침 지나가던 나그네가 왜들 그러느냐고 물었어. 자초지종을 다 들은 나그네가 처방을 내려줬어.”

“어떻게?”

“각 문중에서 뚜껑 있는 항아리 하나씩을 준비하시오. 그리고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항아리에 다 쏟아 담으시오. 그런 후 뚜껑을 꼭꼭 닫아서 무덤을 판 후 함께 묻으시오. 그러면 이 마을이 조용해질 것이오. 그러고 사라졌대.”

“그렇게 해서 묻은 것이 말무덤이구나.”

“그렇지. 참 희한하게도 말무덤을 만든 이후론 마을이 조용해지면서 평화를 되찾았다는 거야.”

말무덤을 둘러본다. 저 안에 말이 묻혀 있다. 수백 년 전 그들이 뱉어낸 말들이다. 어쩌면 화근이 되어 마을을 혼란에 빠뜨렸을 말들이 항아리 안에 갇힌 채 잠들어 있다. 문득, 말들이 깨어나면 어쩌나 끔찍한 생각이 스친다. 내 모습을 본 듯 무덤 위의 민들레가 히죽 웃는다.

말무덤에서 내려오는 길, 돌비석에 새겨진‘귀는 크게 열고 입은 작게 열어라.’ 하는 말에 눈길이 간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험담하던 지난날의 한순간이 머리에 스친다. 귓불이 훅 달아오른다. 

쉿! 자나 깨나 말조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