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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19. 2024

여기, 그 곳

하늘·구름·바람의 땅

구름아, 좀 비켜주렴. 하늘이 푸른 산이 보고 싶어 애원했지만 구름은 들은 척도 안 한다. 지나가던 바람이 구름을 밀어댄다. 구름은 밀리지 않으려고 찔끔찔끔 눈물을 흘린다. 구름이 머물다 가는 곳, 하늘 아래 첫 동네에 부슬비가 내린다. 

산허리를 몇 번이나 휘감고 돌았는지 모른다. 꼬부랑길을 돌고 돌며 오르다 보니 더 오를 곳이 없다. 하늘과 맞닿은 곳, 해발 팔백 미터 고지다. 이렇게 높은 곳에 마을이 있을 줄이야. 군위 화산마을이다.

화산마을은 1960년대에 정부의 산지 개간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 주민은 산을 개간하여 터전을 잡고 고랭지작물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비스듬히 개간한 밭에 배추가 줄지어 앉아 초록 물씬한 몸통을 불린다. 보는 것만으로도 싱그럽다. 주거를 낀 건너 비탈밭엔 토마토가 조롱조롱 다홍빛 색을 띠며 익어간다. 자연이 주는 빛을 저리도 맛있게 먹는다.

전망대에 올라 아래로 내려다본다. 마을을 겹겹이 둘러싼 산등성이마다 구름이 휘감는다. 구름을 스친 바람이 비 냄새 흘리며 화산마을을 휘돈다. 이내 구름이 바람 따라 흐르며 산야에 비를 뿌린다. 하늘과 땅의 중심에서 흐르는 구름이 천지의 경계를 허물고 잔잔하게 퍼진다. 

산과 산을 끼고 있는 군위호가 저 멀리에 보인다. 산허리에서 내려오는 구름과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만나 어우러진다. 신화의 세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오묘하고 신령스러운 풍경을 그린다. 백발의 산신령이 금도끼 은도끼 들고 나타나 이것이 네 것이냐고 물을 것만 같다.

신선이 산다면 이런 곳에 살지 않을까. 뿔이 빛나는 꽃사슴이 사냥꾼에게 쫓겨 달려온다. 얼른 꽃사슴을 숨겨주고 시침 뚝 떼고 쫓아 온 사냥꾼을 따돌린다. 그리고 사슴을 앞장세워 선녀탕으로 간다. 속세에서의 묵은 때 다 벗겨낸 후 하늘하늘한 날개옷 입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때마침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못 봤을지도 모를 절경이다. 하늘이 내려앉아 머리 위로 닿을 듯하고 구름과 안개가 어우러져 병풍을 친다. 병풍 속 녹음은 운무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마술 같은 자연에 감탄이 저절로 쏟아진다.

임진왜란 당시 가을이었다. 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 선생이 화산을 찾아왔다. 맑은 옥정의 샘물을 마시며 화산의 아름다움을 칠언절구 시 ‘옥정영원(玉井靈源)’에 담았다.     

수향화산(誰向華山) 욕문전(欲問田)

누가 이 화산에 밭을 일구려 하는가

선원종차(仙源從此) 유인연(有因緣)

신선의 근원은 여기에서 비롯된 인연이 있구나

제군차아(諸君借我) 운제로(雲梯路)

여보시게 내게 구름사다리 빌려 주시구려

옥정추풍(玉井秋風) 채벽연(採碧蓮)

옥정에 가을바람 불면 푸른 연을 캐리로다     

하늘이 푸르고 맑은 가을날, 하얀 구름사다리 타고 올라 연을 캔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감성은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곳에 올라 있으면 저절로 시인이 되고 신선이 되는 느낌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오래전, 그때를 그린다. 인적은 없고 신선이 살았을 것 같은 이곳에 고뇌 깊은 선비가 찾아와 머리를 식혔으렷다. 멀고 가파른 길을 선비는 어찌 올라왔을지 궁금타. 세상 고뇌 하나씩 하나씩 벗어던지며 쉬엄쉬엄 왔으려나. 이곳에 당도하여 풀리지 않는 나랏일의 매듭을 차근차근 풀어보았으려나. 

선비가 머물렀던 이곳이 하늘정원이다. 여기에 앉아 바람을 맞고, 구름을 잡아보라. 그리고 잠시나마 일상의 자질구레한 근심을 놓아보면 어떨까. 아무도 살지 않았을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에 신선이 살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수백 년 전엔 수려하고 덕망 높은 선비가 이곳에 앉아 시를 읊었다. 인걸은 온데간데없지만 아름다운 시 한 수가 시비(詩碑)로 대신 앉았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힌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었던 구름이 서서히 올라가고, 호수에서 올라온 안개는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바람이 산등성이를 한 바퀴 돌아나간다. 안개 걷힌 산등성이가 말끔하다. 멀리 산너울이 겹겹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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